지하철은 서울시민의 발이다.(표현이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부끄럽다. 그리고 수도권뿐 아니라 주요 광역시에도 지하철이 다 있다.) 출퇴근 수송의 핵심 교통수단으로 하루 평균 약 750만 명, 연간 약 27억 명(서울교통공사, 2019년 기준)이 전철을 이용한다. 일상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전철역 하나로 집값이 억 단위로 오르내린다. 학창 시절 약속 장소도 홍익문고 앞이 아니라 신촌역 3번 출구였고, 청기와주유소가 아니라 홍대입구역 9번 출구였다.
한파가 한창이던 겨울이었다. 사무실에 지각을 했다. 무려 50분이나. 4호선이 50분이나 멈춰 있었다. 처음에는 배차를 조정하느라 멈춰 있구나 생각하며 책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안내방송이 나왔다. 길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믿었던 전철이 배신을 했다. 서울생활 14년 중 두 번째로 겪는 일이었다. 바쁜 승객은 다른 교통편을 이용하라고 했다. 아침 9시에 바쁘지 않은 승객이 어디 있나. 허나 이날은 아침 기온이 영하 18도로 가장 추운 날이었고, 마침 전날 저녁에 폭설이 내려 출근길 도로 상황은 짐작해볼 가치도 없었다. 어차피 지각이 확정됐기 때문에 팀 카톡방에 상황을 설명하고 열차 안에서 가만히 사고가 해결되기만을 기다렸다.(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팀에 나와 같은 상황을 2명이 더 겪고 있었다.)
안내방송이 잦아졌다. 길음에서 사고를 처리하고 있다. 길음에서 사고가 처리됐다. 길음에서 문제가 해결됐다. 길음에서 열차가 출발했다... 멘트는 조금씩 희망적으로 변하는 척했지만 결국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었고 정작 중요한 내용은 들어있지 않았다. 어떤 문제인지, 해결을 하고 있는지, 언제 마무리될지, 길음부터 밀린 배차간격이 풀리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지, 상행선에 사고가 났는데 왜 하행선도 똑같이 멈춰 있는지 필요한 정보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야 사람들이 판단을 하고 대안을 선택할 텐데. 승객들은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전 국민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어떤 일과 비슷한 기시감이 스치기도 했다. 화가 밀려 올라왔다. 9시 반에 잡혀있던 담당 임원 업무보고가 미뤄졌다. 그러다 체념하고 관계자들을 같은 직장인으로서 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30분, 40분이 지나며 다시 쉴 새 없이 화가 오르락내리락했다.
퇴근길 다시 4호선 전철에 올랐다. 환승역인 삼각지역으로 향하는 열차는 동작대교에 올라섰다. 스마트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는 낭만적인 구간이다. 종종 어떤 기관사들은 이 구간을 위해 준비한 멘트를 정성스레 방송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동작대교 위의 야경은 아침의 참담한 지각사건을 잊게 만들었다. 저 멀리 ‘신강’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건물 전체를 화려한 조명이 감싸고 있었고, 동작대교 남단 바로 옆에는 부동산 기사에 빠지지 않는 반포 대장주 ‘아리팍’ 아크로리버파크 단지가, 그리고 조금 떨어져 새로운 대장주로 주목받는 래미안퍼스티지 단지가 아파트 가격만큼 높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은 평생 일해도 닿을 수 없는 평당 가격만큼 찬란해서 단지 전체가 마치 꿀을 가득 머금은 벌집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가로등 조명까지 더해진 창밖을 바라보니 아침에 분노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쓸모없는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당황하고 고생했을 분들을 이해하고 싶어 졌다.
작년 이맘쯤에도 이 구간을 지나고 있었다. 전철은 평소와 다르게 급정거와 급출발을 반복하고 있었다. 번번이 정차해야 할 도어 위치도 잘 맞추지 못해 4~5미터씩 수정하는 일도 이어졌다. 가뜩이나 피곤한 퇴근시간에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급출발이 반복되니 한껏 짜증이 밀려왔다. 그렇게 꾸물거리던 전철은 어김없이 동작대교로 올라섰다. 전철과 나란히 달리는 승용차들이 부러웠다. 전철을 탈 수밖에 없는 신세가 아쉽게 느껴지던 순간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기관사 ㅇㅇㅇ입니다. 저는 이제 첫발을 뗀 초보 기관사입니다. 부드럽지 않고 거친 운전 때문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대신 안전에는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기량을 높여 승객 여러분이 쾌적하게 이용하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만난 최고의 신입사원이었다. 또 내가 만난 최고의 기관사였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라도 내 부족함을 이렇게 당당하게 고백한 적이 있었을까. 문제를 이야기하고 대안과 각오까지 말한 적이 있을까. 짜증은 고마움으로 바뀌었고 따스한 믿음마저 생겼다. 다른 승객들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신참 기관사는 솔직하게 본인을 드러냈고 문제의 원인을 전달했고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 당장의 해결책은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신뢰를 잃지는 않았다.
지각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했던 그날 아침에도 기관사는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사람들은 상황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전철을 포기하고 버스나 도보를 선택하는 판단도 더 명확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각을 면하는 사람이 몇 명이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9시 반에서 오후로 미뤄진 업무보고를 겨우 마쳤다. 새로 실장으로 부임한 임원분께 각자 업무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였다. 어떤 일이든 자랑하고 싶은 것과 숨기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몇몇 내용을 숨겼다. 꺼내놓지 못했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얘기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보고 시간이 부족했다는 핑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신임 실장은 내가 맡은 업무를 잘 이해했을까. 의사결정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한 자리였는데 내 이기심이 목적을 벗어난 결과를 만들지 않았을까.
다시 동작대교 위를 지나는 퇴근길 전철 안에서 나는 화를 내고, 부끄러워지고, 한없이 초라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