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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Apr 09. 2021

좋은생각

그룹 사장단 중 두 분이 퇴임하게 됐다. ‘젊고 유능한 인물을 발탁’, ‘신사업 이해도 높은 적임자’... 사장으로 승진할 때 당신도 보도자료에 이런 수식을 받았을 텐데 이제는 새로운 후임에게 같은 수식어와 자리를 넘겨주게 됐다. (왜 항상 임원 인사 발표는 얄궂게 추운 겨울에 하는 것일까) 사장급 임원이라면 월급쟁이 직장인으로서는 천수를 누렸다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짊어지고 있던 책임이 큰 만큼 아쉬움도 더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새해를 한 달여 앞두고 임원인사 발표와 함께 내게도 숙제가 하나 떨어졌다. 지주사 대표 명의로 퇴임하시는 두 분께 드릴 감사패 문구를 작성하는 일이다. 검색창에 ‘감사패’라고 검색하니 업체도 많고 샘플 문구도 많았다. 하지만 숙제를 주신 사장님은 퇴임하시는 선배들에게 특별한 문구를 선사하고 싶다고 하셨다. 보도자료, 신년사, CEO 담화문 등 10년의 직장생활 동안 여러 가지 멘트를 만들어 봤지만 감사패 문구는 처음이라 기준부터 정해야 했다.


① 뻔하지 않을 것, ② 간결할 것, ③ 간지럽지 않을 것     


비서에게 연락해 퇴임하시는 분들의 프로필도 받고, 대표님들의 언론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고, 함께 일하셨던 분들께 여쭤보며 글감을 모았다. 한 분은 한 가지 분야에서만 일을 하셨는데 신입사원부터 무려 37년 간 일하셨고, 다른 한 분은 외부 인재로 영입된 케이스라 근무 기간은 짧지만 다양한 신규 프로젝트를 주도하신 게 주요 이력이었다. 100자를 크게 넘지 않는 선에서 각 대표님의 특성을 살려 1차 샘플을 적어 대표님께 보여드렸는데 결과는 탈락. 소재는 좋은데 조금 감상적이라는 게 반려의 이유였다. 스스로 세운 3번 기준을 지키지 못했다. 새벽도 아니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오전에 썼는데 왜 감상적으로 느꼈을까. 조금 떨어져 다시 읽어보니 퇴임하시는 분들에게 살짝 감정이입을 했던 게 이유인 것 같았다. 건조한 마음으로 단어를 고쳐 오후에 수정본을 보여드렸고 수정본은 다행히 통과되어 감사패를 발주했다.  

   

집에 오니 아내가 얼마 전 처가에서 가져온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슬쩍 곁눈으로 살펴보니 연애시절 주고받은 물건들을 담아놓은 상자였다. 쓸모없는 물건을 과감히 버리고 상자를 줄이는 게 목표라고 했다. 가만히 옆에 앉아 졸업앨범을 펼쳐보는 마음으로 상자에서 하나씩 나오는 물건을 바라봤다. 아내에게 가장 처음 준 선물이었던 새하얀 꽈배기 패턴의 클라이드 목도리부터 영화티켓, 핸드폰줄, 다이어리, 엠피쓰리, 모토로라 크레이저 폴더폰, 증명사진까지 십수 년 전의 물건들이 나타나 폐기와 보존의 두 갈래 운명으로 나뉘었다. 그중 백미는 잡지 『좋은생각』 이었다.      


아내와 연애하던 초기에는 학교 때문에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에 몇 줄씩 끄적여 전하는 것으로 편지를 대신하곤 했다. 왜 『좋은생각』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격이 2천 원이라 부담이 없어서 골랐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입시 스트레스, 기숙사 생활의 외로움, 연애 초기의 달달함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좋은생각』 페이지마다 연인을 향한 감성 터지는, 터지다 못해 폭발하는 멘트를 적어 보냈다. 주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새벽 1시쯤 ‘좋은생각’을 펼쳤으니 감성의 농도는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


아내는 족히 스무 권이 넘는 (내가 전했던) 『좋은생각』을 상자에서 꺼내 한 권씩 다시 내 손에 쥐어주었다. 껄껄과 깔깔의 중간쯤 되는 비웃음을 함께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단호하게 정독을 거절했다. 이유식을 거부하며 도리도리하는 자식놈의 얼굴처럼 연신 고개를 저었다. ‘분명 펼치는 순간 손발이 사라질, 저 오글거리는 글을 읽지 않으리라.’ 내가 한사코 『좋은생각』을 거부하고 있으니 아내는 직접 표지를 넘기며 문장을 떠먹여 주기 시작했다. 오글거림을 견딜 수 없는 나는 거실로 대피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말을 적었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썼는데...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좋은생각』의 부끄러움은 까맣게 잊고 서점 ‘북티크’에서 진행하는 온라인 글쓰기 챌린지를 덜컥 신청했다. 일주일에 한 편도 아니고 매일매일 한 편의 글을 카톡에 올리는 챌린지였다. 전업 작가도 아니고 일기도 쓰지 않는 일개 직장인에게는 분명 무모한 도전이다. 이 사실을 아내에게 고백하자 아내는 독자가 되지 않겠다며 단호히 의사를 나타냈다. 남편의 간지러운 문장을 읽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무모한 도전의 참가비를 입금하며 나도 같은 다짐을 했다. 


[간지럽게 감성 터지는 문장은 쓰지 말자. 최대한 빼고 덜고 써보자.]     


다시 며칠이 지나 12월의 마지막 날. 연예대상, 연기대상, 가요대상으로 채널을 돌리며 아내가 물었다. 

“새해 목표가 뭐야?”

갑자기 물었지만 별 고민 없이 세 가지를 대답했다.

[큰애가 ‘아’와 ‘이’를 똑바로 구분하는 것. ‘기차’를 ‘가치’로 읽지 않고 제대로 읽는 모습]

[그리고 살 빼서 옷장에 걸린 저 많은 정장을 다시 입는 것. 매년 하는 다짐이지만...]

[마지막으로 글쓰기 챌린지를 완주하는 것. 욕심을 한가득 덜어낸 글들로 말이지]     


하고 싶은 일들은 여전히 많지만 거창하게 세우는 새해 목표는 이제 부질없다고 믿는 나이가 됐다. 당장 눈앞에 놓인 소원부터 하나씩 클리어하는 게 어른다운 일이라고 믿는다. ‘기차’를 ‘기차’로 똑바로 읽는 것쯤은 큰애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고, 옷장에서 된장처럼 묵히고 있는 정장은 살을 빼지 않고 새로 사면 될 일이다. 그에 비해 마지막 소원은 조금 더 마음이 쓰인다. 간지럽지 않게, 욕심부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달 동안 매일 기록하는 게 가능할까. 10년이 지나서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펼쳐볼 수 있는 좋은 생각이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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