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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Apr 04. 2021

때론 서방정이 필요해

송도로 출장을 다녀왔다. 오전에 송파에서 미팅이 있고 오후에 송도에서 두 건의 인터뷰가 연달아 있었다. 송현아(송도현대아울렛) 근처에 위치한 계열사는 매번 주차장부터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로비 기준으로 1, 2, 3층은 지상주차장 기준으로 1~5층으로 잘게 나뉘어 연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3층으로 가려면 엘리베이터에서 숫자 5를 눌러야 하는 번거로움으로 방문객을 곤란하게 하는 곳이었다. 출장을 가서도 생각 없이 있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또 한 번 당하고야 말았다.     


미리 일정을 잡고 갔지만 여느 인터뷰가 그렇듯 우선순위가 밀렸다. 덕분에 4시로 예상했던 외근 종료시간이 6시를 넘었다. 인사를 하고, 노트북을 정리하고, 로비 회전문을 나섰다. 봄이 됐지만 송도의 바람은 매서웠다. 고층빌딩 사이로 부는 바람인지 매립지 특유의 바닷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은 내 이동 방향을 따라 전후좌우에서 몰아쳤다. 일기예보에 나온 기온만 믿고 입은 얇은 점퍼로는 바람을 막아내기 버거웠다. 여전히 찬기운이 잔뜩 녹아있는 바람이 파고들었다. 지하철 출구에 이르러 탁 트인 공원을 마주하니 바람의 모양이 비로소 보였다. (아마도) 육풍이었다.      


초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 아무튼 해풍과 육풍이란 내용을 과학시간에 배운다. 낮에는 바다보다 육지가 따뜻해서 육지가 저기압 상태가 되므로 바다에서 육지 방향으로 ‘해풍’이 분다. 반대로 밤에는 육지가 바다보다 빨리 차가워져 바다가 상대적으로 따뜻한 저기압 상태가 되므로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 육지에서 바다 방향으로 ‘육풍’이 분다. 송도는 바다가 가까웠고, 제법 어두워진 시간이었으니 볼을 때리는 바람은 (과학시간에 배운 내용을 충실하게 적용해볼 때) 육풍이었다.     


학창 시절 항상 어떤 개념을 이해하는데 남들보다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린 것 같다. 해풍과 육풍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쉽게 대답할 때도 나는 육지와 바다의 온도차, 기압차, 바람의 이동을 순서대로 생각하고 나서야 해풍인지 육풍인지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학부 전공 때문에 필요한 환율도 그랬다. 달러/원 환율은 쉬워서 금방 이해했지만 달러를 기준으로 엔, 위안, 유로가 움직이고 그 움직임을 다시 원화로 표시하는 건 손가락으로 숫자를 셈하는 것처럼 오래 걸렸다. 특히 어떤 통화가 다른 통화를 기준으로 평가절상이 되거나 절하가 되는지 물어보는 문제는 문제를 읽는 것부터 한숨이 나왔다. 채권 이자율도 마찬가지다. 국채가 싸지고 비싸지는 것은 이자율이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공채 매입 할인율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순서를 따지느라 오래 걸린다.    

  

이렇게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나는 답답한 얼굴을 자주 하고 있다. 나이가 어릴 때는 엄마는 나를 보며 “저런 머리로 어떻게 대학을 갔는지 신기하네”라는 대사를 자주 하셨고, 나이가 찬 최근에는 아내가 나를 보며 “네가 어떻게 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오는지 신기하네”라고 엄마와 비슷한 대사를 자주 한다. 물론 나도 그 대사에 자주 동의한다.      


송도를 포함해 전국 곳곳의 계열사를 다니며 2021년 새로 임원(상무보) 직함을 받은 ‘신임 임원’ 분들을 만나 뵙고 있다. 각자 한 시간 정도씩 인터뷰를 하며 준비한 질문을 하고 그분들의 각오와 생각과 기쁨과 당부와 답변을 듣고 있다. 직장인의 1%가 채 되지 않는 자리가 임원이다. 특히 민간기업의 경우는 임원의 비율이 더 적다. 그만큼 직장인으로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다. 그분들을 만나보니 공통점만큼 차이점도 다양했다. 부장 승진 2년 만에 임원에 오른 분도 있고, 외부 인재로 채용되어 이듬해 승진한 분, 한 가지 분야의 생산기술 담당자로 임원에 오른 분, 길게는 입사 30년 만에 임원이 된 분까지 저마다의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지원부서 담당자로 30년 만에 임원이 된 분이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전했다. 영업, 연구와 같은 부서는 짧게는 십수 년부터 보통 20년 정도에 임원 자리에 오르는데 당신은 30년이 걸렸다. 사실 지원부서 담당자였기 때문에 임원이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영업은 돈을 벌어오지만 지원은 말 그대로 영업이 잘 공격할 수 있도록 백업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침착하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임원이 됐다. 남들이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르게만 가고 있다면 조금 오래 걸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내 이름에는 민첩하고 영리하다는 뜻의 한자가 있다. 부모님께서 이름에 한자를 잘못 쓰신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면 너무 큰 바람을 담으셨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만큼 민첩하거나 영리하지 않은데. 다만 느려도 잘 이해하고 실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퇴근길에 ‘타이레놀 서방정’을 하나 사다 달라고 했다. 그냥 타이레놀은 안되냐고 물으니 그건 먹고 나면 속이 쓰리다고 했다.     


* 서방정(徐放錠) : 유효 성분이 천천히 방출되도록 만든 알약. 일반 알약에 비해 천천히 흡수되어 약효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빠르고 확실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천천히 녹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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