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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기군 Mar 17. 2021

일삼존부터

16살. 매주 일요일 아침 10시면 볼링장에 갔다. 볼링장에 도착하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 1교시부터 보습학원 종료시간까지 징그럽게 어울리던 친구들이 다시 모여있었다. 카톡이 없어도, 페메가 없어도, 굳이 전화하지 않아도 친구들은 볼링장에 모여 있었다. 이 시간은 동네 볼링장에서 매주 레인 정비를 하는 시간이다. 정비 시간에는 공짜로 볼링을 계속 칠 수 있다. 중등부 볼링 선수를 하고 있던 같은 반 친구가 알려준 고급 정보였다. 사실 우리 반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정보였지만 굳이 일요일 아침에 볼링장에 나오는 아이들은 우리뿐이었다. 볼링장은 우리들에게 사랑방이자 오후 일정을 위한 교두보였다.


레인 정비는 간단했다. 가로 폭이 레인 폭과 똑같은 커다란 걸레를 레인 시작부터 끝까지, 1번 레인부터 16번 레인까지 슥슥 한 바퀴 밀어주는 것뿐이었다. 레인 정비 시간으로 정해진 1시간 동안 우리는 공짜로 빈 레인에서 볼링을 쳤다. 선수 친구도 연습을 하러 나와있었기 때문에 눈치가 덜 보였다. 우리는 선수 친구에게 기본자세를 배우고 종종 원포인트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쌓았다. 모이는 인원은 대체로 6명에서 8명 사이였으니 자연스럽게 팀을 짜 랠리경기를 했고, 더욱 자연스럽게 점심 내기를 했으며, 내기 덕분에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당시 최고 기록은 190점에서 200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 점수는 순전히 하우스볼로 거둔 스코어인데 사실 볼링장에 있는 하우스볼을 가지고는 200점 이상을 치기가 어렵다. 일단 하우스볼에는 코어가 없어서 훅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고, 손에 맞게 지공된 공을 찾기 어려워 그립도 쉽지 않았다. 매번 갈 때마다 공을 새로 찾아야 했고, 심지어 나는 손이 작아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공으로 쳐야 했기 때문에 핀이 덜 넘어가는 불리함도 있었다.(대부분 가벼운 공은 작은 손에 맞게, 무거운 공은 큰 손에 맞게 지공이 돼있다)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애버리지 점수를 올려야 했다. 볼링장에서 파는 가장 싼 아대까지 하나 장만해서 열을 올렸다. (그때의 맹렬한 연습 덕분인지 지금도 회식이나 모임에서 어쩌다 볼링장에 가도 150점 언저리는 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 정도 점수면 다행히도 내기에서 지는 일은 거의 없다.)


볼링을 잘 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스트라이크를 치면 된다. 그럼 스트라이크는 어떻게 칠까. 보통 1/3포케팅, 1/2포케팅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핀을 공략하면 된다. 볼링핀은 1번부터 10번까지인데 맨 앞 가운데 핀이 1번, 우리가 바라보는 시점에서 1번 핀의 왼쪽 핀이 2번, 오른쪽 핀이 3번 핀이다. 대부분 오른손잡이이므로 1/3포케팅을 가르쳐준다. 선수 친구는 여기를 1/3존(일삼존)이라고 불렀다.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1/3존을 공략하는 방법은 공이 휘어 들어가도록 훅을 주거나 대각선 방향에서 직선으로 굴리는 방법이 있다. 보통 3번 핀보다 1번 핀에 조금 더 두껍게 맞는다는 느낌으로 쳐야 한다. 그렇게 1/3존으로 공이 들어가면 나머지 핀들은 연쇄작용으로 쉽게 넘어간다. 볼링을 배운 첫날, 선수 친구는 구경하라며 스트라이크 7개를 연속으로 순식간에 치는 것을 보여줬다. 모두 1/3존으로 들어간 공이었다.(친구 공을 빌려 써봤는데 비싼 공이라 그런지 대충 굴려도 알아서 스트라이크가 돼서 무척 부러워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일요일 아침 정비 시간에 볼링을 치면 스트라이크를 치기 더욱 어려웠다. 방금 기름칠을 한 레인은 무척 미끄러워 훅이 밀려나기 일쑤였고, 가벼운 하우스볼로는 일정하게 라인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스트라이크를 치기 위해서는 1번 핀과 3번 핀 사이에 더욱 집중해야 했다. 유독 라인 잡기가 어렵던 날, 선수 친구에게 어떻게 1/3존을 치는지 팁을 물어봤다. 


“9번, 10번까지 넘어가는 거 생각하지 마. 네 공이 들어갈 곳만 바라보고 던져.”     


3월, 기약 없는 온라인 강의로 대학원 수업이 개강됐다. 개강과 함께 구글 캘린더에 목표라고 적어놓은 알림이 하나 둘 울렸다. 다이어트(웨이트 트레이닝), 클라이밍, 영어공부, 대학원, 글쓰기, 책 읽기, 첫째 아이 한글 공부, 프랑스어 공부, 기타 배우기, 드리프트 배우기... 끝도 없는 목표가 적혀 있다. 대부분 올해가 아니라 예전부터 생각만 하고 있던 것들이다. 이렇게 들춰보니 지금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계획이 없다.     


- 웨이트 트레이닝은 보디빌딩 트레이너 자격증만 따놓고 몇 년을 깨작거리고 있다. 내 뱃살을 보고 트레이너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 클라이밍은 4개월 신경 써서 다니다 작년에 이사를 한 뒤로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잠정 중단 상태다. 내 체중으로 벽에 매달리는 것은 벽에 붙은 홀드에 미안한 일이다. ‘살 빼고 다녀야지’ 입장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


- 영어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볼 심산으로 핸드폰에 TED 영상도 다운받고 스크립트도 뽑아놨는데 전철에서는 늘 밀린 웹툰, 야구뉴스만 보고 있다. 심지어 경품으로 받은 아이패드 미니가 있음에도 그렇다


- 대학원은 이제 2학기를 마쳤는데 학부 전공과 내용이 너무 달라 수업과 과제만 간신히 따라가고 있다. 추가로 공부할 마음에 구입한 두꺼운 전공서적 2권은 책상 밑에 잠들어 있다


- 기업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파이썬 정도는 교양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책도 사고 유튜브 강좌도 구독을 눌러 놨는데 강의 수강은커녕 아직 노트북에 파이썬을 설치하지도 않았다


- 첫째 아이 한글 공부. 역시 ‘구몬을 부르기 전에 내가 해보자’고 마음을 먹고 책도 여러 권 샀지만 아이와 공부를 하면 화가 날 뿐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아이와의 싸움으로 끝난다


- 여기에 올해 들어 회사에서 맡은 일도 늘었다. 모르던 일도 아니고 특별히 업무량이 많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불편해 우왕좌왕하며 1분기를 보내고 있다


심각하고 부끄러운 자기 고백이다. 내가 마주한 일들 중에서 1번 핀과 3번 핀은 무엇일까. 1번과 3번 핀을 찾아 공략하기만 하면 왠지 나머지 일은 쉽게 풀릴 것 같다. 볼링에서도 1/3존에 공이 제대로 들어가면 확인하지 않아도 스트라이크를 칠 수 있다. 혹 공을 잘못 던져 1번 핀에 얇은 두께로 공이 맞아도 못해도 7~8개, 운이 좋으면 9개의 핀을 쓰러뜨릴 수 있다. 스플릿이 생겨도 6개는 넘어간다. 볼링처럼 목표의 7할만 이뤄도 대성공 아닌가.


많고 많은 계획과 할 일들을 가만히 다이어리에 적어보았다. 그리고 1번부터 10번까지 나름의 번호를 매겼다. 왼손잡이는 1번과 2번을 공략한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1번과 3번을 공략해야 한다. 연쇄적인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져다 줄 1번 핀은 무엇일까. 친구의 말처럼 9번과 10번 고민은 나중에 하고 우선은 ‘일삼존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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