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실장님이 부임했다. 인사실장을 하면서 우리 실을 겸직하게 된 실장님께 간단히 업무보고를 하고, 함께 점심을 먹고, 각자 눈치를 살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2011년 5월, 첫 직장에 입사해 만 10년 근속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야구선수로 따지면 11번째 시즌을 맞았다. 중간에 이직을 한 번 하긴 했지만 공백 없이 사무실을 옮겨 중간에 쉬었다는 느낌이 없다.(지금도 그때 휴가를 길게 쓰지 못해 아쉽다) 첫 팀장님부터 올해 새로 맞은 실장님까지 직속 상사를 세어보니 11명이다. 한 달 정도 일했던 팀부터 2년 넘게 함께 일한 팀장님까지 연평균 1명의 팀장(실장)을 새로 만났다. 몸담았던 팀은 6개인데 팀을 거쳐간 수장은 그 두 배 수준이라니. 이렇게 지난 시간을 따져보니 내게 팀장을 갈아치우는 능력이라도 있나 하는 의심이 든다.
대학 마지막 학기, 중간고사를 치른 5월, 덜컥 취업이 됐다. 흔한 인턴 경험도 없이 일을 시작했고, 여름까지는 기말고사와 레포트를 쳐내야 하는데 회사일과 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 팀장님은 그런 사정을 충분히 배려해 주셨다. 기대만큼 일을 하지 못하는 신입사원에게 답답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 날도 많았지만 여유가 생길 때마다 학교생활에서 직장생활로 부드럽게 모드를 전환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그때 권해주신 책을 사놓고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부드러운 모드 전환'은 그저 내 생각뿐인지도 모르겠다)
이듬해, 첫 팀장님은 다른 팀으로 발령을 받으셨고 책상을 옮기던 날 내게 나는 회사생활을 착실하게 할 스타일이니 앞으로 직장생활을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인사를 남기셨다. 그렇게 직장생활 두 번째 팀장을 새로 만났다. 잘 보이고 싶었다. 작년까지 신규 팀장 밑에서 일했던 동기에게 팀장은 뭘 잘 먹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질문하며 자료조사를 했다. 알고 보니 고속승진을 한 케이스라는 사실을 듣고 배울게 많을 것 같아 매일같이 야근하는 팀장을 따라 같이 야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달 지나고 보니 내 행동은 쓸데없는 일이었다. 팀장은 혼자 일하는 사람이었다. 팀과 팀원들의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팀장이었다. 그 팀장과 일하는 14개월 동안 몸과 마음이 무척 힘들었다. 20대 청춘의 신입사원이 한약을 먹고 가정의학과를 자주 드나들어야 했던 시기였다. 직장생활 중 최악의 상사를 꼽으라는 질문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선택해야 하는 팀장이었다.
어쩌다 보니 직장에 10년을 다녔다. 이제는 제법 짬이 생겨 회사일 돌아가는 눈치도 보고 행동하게 됐다. 그리고 평가, 실적, 성과 같은 기준들이 팀의 리더에 의해 좌우되지만 정작 그 기준들이 내 인생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회사일과 개인생활을 분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사회생활을 하며 얻은 자산은 이것뿐인 것 같다.
요 근래 우리 그룹 부회장님 의전을 담당하며 함께 식사하는 기회가 왕왕 있었다. 우리 그룹에서 부회장직은 대졸 신입사원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심지어 현재 부회장님이 사장에서 승진하기 전까지는 한동안 부회장이라는 자리가 있지도 않았다. 회사원으로서 가장 오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부회장님께서 어느 날 점심 식사에서 이런 얘기를 하셨다.
“너네, 내가 부회장까지 어떻게 승진했는지 알려줄까?”
궁금하지 않은가. 솔깃했다. 자리에 있던 모두 귀를 세웠다. 백종원의 만능 양념장같은 비법이 혹시 있을지 기대했다. 부회장님은 잠시 뜸을 들이시고는.
“별거 없어. 너네들이 지금 모시고 있는 상사가 잘되게 하면 되는 거야. 쉽지?”
다들 김은 샜지만 실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입매를 고치며 짐짓 이해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 뒤로 부회장님은 꽤 길게 설명을 덧붙였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에피소드도 몇 개 소개하셨다. 요는 상사가 잘되게 하라는 얘기는 아부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사가 지시하는 것, 상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제대로 처리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다시 2011년 신입시절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이웃팀 선배와 동기, 인턴들이 모인 저녁자리에 갔다. 자리를 호스트 했던 선배도 나름 잘 나가는 커리어 패스를 밟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볼 땐 특별히 열정적이거나 야근이 많거나 집중력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자리를 옮겨 한참 맥주를 마시는데 한 인턴이 일 잘하는 방법 같은걸 물어봤다. 특별히 고민도 없이 선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별일 아니라는 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
“별거 없어. 팀장이 시키는 일 빵꾸 안 내고 제때 해주면 돼. (잠시 공백) 그런데 그게 어렵지.”
정말이었다. 10년을 다니는 동안 그 말을 지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실히 느꼈다. 좋은 팀장, 싫은 팀장을 가리며 스트레스도 받곤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결국 내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날이 너무도 많았다. 오히려 불평만 더 많았다. 내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매년 팀장이 바뀐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고 우리 팀을 떠나 더 좋은 자리로 간 사람도 있고, 좌천된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업무능력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 지난 10년 동안 특별히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여전히 내가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며칠 전 여수 출장길, 차를 운전하며 문득 생각이 스쳤다. 회사를 10년이나 다녔다니. 운이 좋아 20년 넘게 다닌다고 하더라도 올해가 딱 반이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지금 직장생활의 반환점을 돌고 있구나. 그런데도 나는 특별히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그 이후 이어지는 쓸데없는 생각들...
앞으로 몇 명의 팀장(실장)을 만날지 모르지만, 혹은 분수에 맞지 않게 먼 미래에 팀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남은 직장생활 기간 동안 제대로 일할 줄 아는 분야가 하나라도 남기를 바란다. 그러면 좋겠다. 그래서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결과를 만드는 사람으로 발전하고 싶다. 이번에는 새로 부임한 실장님께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
“실장님, 저는 잘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