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열고 이스라엘 출신 싱어송라이터 Dennis Lloyd의 ‘Nevermind’를 검색한다. 1hour loop 버전을 클릭한다.
“Alright, I'll take it on, take it on me. Take it on me, hmm, baby.
All I ever ask ever ask. Are you gonna, are you gonna be my lover?”
며칠 전 유튜브가 골라준 음악 중 하나인데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빠르고 적당히 흥겹다. 내 취향을 맞추는 것일까. 사용자를 어떻게 지켜보는 것일까.
11시 50분. 사내판매에서 싸게 득템한 헨리코튼 셔켓(셔츠+자켓)을 의자 등받이에서 걷어 올리며 부장님이 물었다.
- ㅇ과장아, 오늘 방송업체랑 점심 먹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갈래? 약속 없으면 같이 가자.
"아뇨 괜찮습니다 다녀오세요."
= 놔두세요 ㅇ과장은 혼자 있는 거 좋아해요. (같이 나가던 과장님이 거들어준다.)
- 그래? 그럼 우리끼리 갔다 올게.
"네 다녀오세요."
한 시간을 조용히 있을 수 있게 됐다. 유튜브 앱을 열고 Dennis Lloyd의 ‘Nevermind’ 1hour loop를 재생한다. 음악소리로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를 죽여야 한다.
점심 전에 긴 미팅을 하고 왔다. 미팅이라기보다는 인터뷰인데, 인터뷰이는 카시트 봉제 영업을 담당하는 팀장님 한 분이었다. 너무 바빠서 시간 내기 어렵다고 하던 팀장님은 오전 10시부터 본부장님이 호출한 11시 반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카시트 봉제의 개념부터 공정 자동화가 어려운 이유, 직원들을 쥐어짜는 새로 온 본부장, Assy업체와의 협상 이야기, 목표만큼 줄이지 못하고 있는 생산원가, 완성차 브랜드가 내수에서 잘 팔리고 있어서 그나마 올해 실적이 괜찮다는 이야기까지, 영업 팀장으로서 내게 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줄줄이 꺼냈다. 또 팀장님 당신은 본인이 팀원이었을 때는 퇴사를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무심하고 건조하게 퇴사를 권하던 사람이었는데 팀장이 되고 나서는 직원들이 나갈까 두려워지기도 했고, 또 그런 감정과는 반대로 우리 팀에서 인정받아서 더 좋은 제안을 받고 이직하는 후배들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자리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다.
내 메인 업무 중 하나다. 그룹에서 소위 말하는 ‘일 잘하고 성과 좋은’ 직원들의 이야기를 15분 안팎의 스토리로 만들어 그룹 직원들과 공유하는 일이다. 매주 1명씩 발굴해서 알리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이 생긴지는 8년이 넘었고 내가 담당자로 일한 지는 3년이 조금 넘었다. '모두가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고, 실제 직원들의 이야기를 서로 전달하고 들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명예회장님의 지론이 강력한 스폰서로 작용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이다.
매주 새로운 직원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미팅을 하고 이야기를 듣는 일. 신입직원부터 사장까지, 구내식당 영양사부터 바이오 플라스틱을 개발하는 연구원까지, 이 프로그램 덕분에 매년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나고 수십 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즉 그룹의 거의 모든 사업 영역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고 기회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공장 생산 담당자에게 당연한 용어를 나는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다. 골프장 클럽하우스 지배인의 설명은 골프를 치지 않는 내게 한 번에 와 닿지 않는다. 결국 각자의 이야기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로 변하기까지 내가 계속 듣고, 질문하고,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한 명당 적게는 3~4번, 많게는 5~6번씩 만나고 있다.
인터뷰 일정이 꼬여 하루 만에 이번 주 발표자와 최종 버전을 다듬고, 다음 주 발표자와 자료를 수정하고, 다다음주 발표자와 스토리라인을 잡기라도 한 날은 귀마개라도 하고 싶어 진다. 이런 날은 영어로 진행하는 컨퍼런스에 참석해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을 어떻게라도 이해해 보려고 고생하다 돌아온 듯한 피곤함이 가득해진다. 복도에 끌고 가는 카트 소리부터 볼펜 딸깍거리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도 음악을 꺼버린다.
집에 돌아오면 각각 7세, 5세 시즌을 맞은 아이들이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고 있다. 대체로 밤 11시에 잠드는 생활패턴이라 그런지 집에 도착한 7~8시에는 텐션이 최고조에 올라 있다. 인형을 던지고, 이 방과 저 방을 오가며 잡고 잡히고, 웃고 떠들다 갑자기 싸우고, 싸우다 갑자기 웃고 떠들고 정신이 없다. 한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날도 있지만 작은 소음도 참기 어려운 날엔 괜히 화를 내고 아이들과 싸우게 된다. 아내가 그날 있었던 일이나 아이가 어땠는지 해주는 이야기들도 심드렁하게 대답하게 된다.
카시트 봉제 영업팀장님을 만난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집에 돌아오니 아내는 핸드폰으로 일본 동요대회에서 은상을 받아 화제가 됐다는 만 2세 여자아이의 동영상을 보여줬다. 마이크용 스탠드의 높이를 최대한 줄인 것 같은데 그것보다도 키가 작은 아기였다. 첫째 녀석은 이미 여러 번 돌려봤는지 벌써 일본어 동요를 외워서 따라 부르고 있었다.
“마이고노 마이고노 코네코짱. 아나타노오우치와 도코데스카. 오우치오키이테모 와카라나이.”
보는 둥 마는 둥, 듣는 둥 마는 둥,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씻고 안방으로 숨었다.
이야기를 듣는 게 직업이면서 많지도 않은 가족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조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 고생하면서 집에서는 그냥 듣기만 하면 되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가족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안방으로 숨었던 다음날 결국 또다시 마음 가득 후회를 했다.
‘이장’이라는 영화가 있다. 가족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무관심이 가족의 관계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오해를 만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다. 영화에 나오는 5남매는 영화 내내 모두 자기의 말만 하고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아이는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고 본인은 정리해고를 당한 맏이, 바람난 남편의 뒤를 캐고 있는 둘째, 결혼을 위해 보상금 오백만 원에만 관심이 가는 셋째, 대자보를 붙이는 방식으로 사회와 싸우고 있는 넷째, 그리고 갈등의 원흉으로 지목된 막내아들까지. 모두 본인 사정만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물론 갈등이 봉합되는 클라이맥스 장면이 있다)
다시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며 유튜브로 아내가 보여준 동요대회 영상을 예습하듯 찾아본다.
“미아가 된 아기 고양이. 너희 집은 어디니. 집이 어딘지 물어도 몰라요. 이름을 물어도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