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예전에 공책에 썼던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은교]와의 만남은 생각보다 로맨틱했다.
효석문화제의 개막식이 열리는 날, 어둑해질 무렵 찾은 봉평.
혹여 효석문학상 수상과 이어진 문학의 밤 행사들이 모두 끝났을까...부랴부랴 행사장을 찾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예정보다 늦게 시작된 행사가 중반쯤 진행 중이었다.
중간쯤의 자리에서 시작해 조금씩 앞으로 옮긴 좌석은 어느덧 맨 앞좌석.
거기서 작가 윤대녕과 박범신을 만났다.
소설낭독 코너를 통해 윤대녕의 최근작 [대설주의보]와 박범신의 최근작 [은교]의 일부분을 접했고, 소설과 관련된 작가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것이 내가 가진 [은교]와의 첫대면이었다.
소설가 박범신이 [은교]의 일부분을 낭독중...
화면으로는 [은교]의 일부분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문학의 밤 행사가 끝난 늦은 밤, 행사장 옆에 있는 간이서점을 향했다.
혹시나...하는 맘에서였지만, 그곳에선 역시 [은교]가 판매되고 있었다.
게다가 작가의 친필 사인이 담겨있기까지...
정가를 모두 치르고 [은교]와 [대설주의보]를 사가지고 나오면서도, 할인되지 않은 작가들의 숨결이 묻어있는 듯해서 뿌듯하기만 했다.
그렇게 [은교]와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한밤 잠자리에서 조금만 읽어야지...하고 펼쳐들었던 소설은 결국 새벽2시경 완독을 하고 나서야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그만큼 [은교]는 매력적인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작품은 시인 이적요와 소설가 서지우, 그리고 여고생 한은교 이렇게 세명의 삼각구도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물론 셋의 중심엔 한은교가 있다. 아니, 셋의 중심은 이적요일까? 아님, 서지우일까?
그렇듯 셋은 묘하게 얽혀있다.
소설을 끌고 가는 커다란 한 축은 이적요의 노트이다.
이적요가 죽은 1년 뒤, 이적요의 변호사는 이적요의 유언에 따라 그의 노트를 공개하기 위해 펼친다.
노트에는 69세의 이적요가 17세의 한은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그리고 그 사랑때문에 10년동안 함께했던 제자인 서지우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과정이 어떠했는지...자신이 빨리 죽음을 맞기 위해 어떻게 세상을 등졌는지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또다른 한 축은 한은교가 지니고 있다가 변호사에게 건넨 서지우의 일기이다.
소설가로서의 천재성을 갖추지 못했던 서지우가 스승인 이적요와 함께 꾸민 위장과 한은교때문에 스승에게 느끼는 반감, 그리고 스승이 혹여 파멸의 길을 걷게될까 갖는 두려움. 여러 종류의 애증이 얼키고 설켜 서로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가 일기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은교는 그 둘의 중간에 있다.
이적요와의 플라토닉과 서지우와의 에로스적 사랑의 교집합이라고나 할까?
한은교에 대한 반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절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묘함이 아마도 한은교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가 한달 반만에 폭풍같은 질주로 썼다는 [은교]는, 내게 박범신이라는 소설가를 좀더 인간적으로 보이게 한 반면, 그의 폭풍같은 글쓰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했다.
효석문화제 문학의 밤 행사에서 사회자가 박범신에게 물었다.
"[은교]에 보면 69세의 노인이 17세의 여고생을 사랑하게 된다는 설정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도 정말 그런 사랑이 가능한가요?"
박범신은 소설 속의 문구를 인용하며 이렇게 답했다.
"'젊은 사람들의 젊음이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소설 속에 나옵니다. 노인이라 해도 사랑의 감정은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덧붙여 말하면, [팡세]를 남긴 파스칼은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고 말했으며,
세익스피어는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없는 광기'라고 했단다. 사랑은 정말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 '미친' 감정일까?
아니면, 도대체 [은교]에선 누가 잘못한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