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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태주 Sep 26. 2021

내가 만난 최고의 문장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

너였다. 지금껏 내가 만난 최고의 문장은. 나는 오늘도 너라는 낱말에 밑줄을 긋는다. 너라는 말에는 다정이 있어서, 진심이 있어서, 쉴 자리가 있어서, 차별이 없어서,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나는 너를 수집했고 너에게 온전히 물들었다.     


나는 가끔 시적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형광 물고기 같은 별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저 별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내 생각의 결론은 대부분 아름다워서 슬프다. 가령 이렇다. 더 이상 우리가 사랑할 수 없게 된 말들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은하게 떨리며 빛날 수가 없다. “시인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별자리에 특이한 움직임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독일 시인 노발리스의 문장이다. 시인들은 말수가 적으면서도 은유하는 말로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종족이다. 별은 무선 조종 장치 같은 걸로 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별이 말의 무덤, 혹은 말의 영혼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알퐁스 도데의『별』첫 문장은 외로움이 짙게 묻어난다.

“뤼브롱 산에서 양치기를 하던 시절, 나는 몇 주 동안이나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나의 개 라브리와 양들을 데리고 목장에서 혼자 지냈다.”

작가가 제목으로 내세운 ‘별’은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과 고립된 말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메타포가 아닐까. 별과 말은 분명 하나의 운명이다.    

  

외로워서 말이 생겨났고 그리워서 별이 생겨났다면, 사람은 왜 생겨났을까를 고민하다가 나는 열아홉 살의 세계로 편입됐다. 그 얼떨결의 열아홉 살 여름에 J. 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을 만났다. 주인공 콜필드는 넓은 호밀밭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아이들을 상상한다. 아이들이 호밀밭을 마구달리다가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종일 아이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들끓는 영혼을 가진 그가 어둠에 속박당한 내면과 힘겹게 투쟁하고 있다고 나는 해석했다. 양치기가 그렇듯이 파수꾼이란 얼마나 견고한 외로움에 종사하는 직업인가.

외로운 생업이 또 있다.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는 나라를 잃고 떠돌다 정착하고 싶어 등대원이 된 노인의 이야기다. 고독을 선택한 노인은 말한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방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고독이란 비로소 자기 자신과 함께 있게 된 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양치기나 파수꾼이나 등대지기는 별이 발명한 직업군이다.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고, 그토록 사람의 말이 그리울 수가 없다. 나는 어쩌다 시인이 되어 고독에 세 들어 살고 있다. 정치가는 정치가 직업이고, 의사는 의료가 직업이고, 사업가는 사업이 직업인데 시인은 시가 직업이 아니다. 그래서 양치기나 파수꾼이나 등대지기 같은 직업들이 시인에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별과 가까운 사람, 밤에도 깨어 있는 사람,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사람. 어찌 보면 특정 직업으로 시인을 한정할 필요가 없겠다. 회사원이나 환경미화원, 혹은 소방관이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별을 올려다보았다면 잠시 시인이 된 것이다. 별은 그들 가슴에 너라는 낱말 몇 개를 모스부호처럼 새겨 넣었을 것이다.   

  

『너의 말이 좋아서 밑줄을 그었다』에는 말의 빛과 어둠과 열에 관한 글들이 담겨 있다. 별의 말, 꽃의 말, 죽은 것들과 교감한 말이 들어있다. 내가 귀 기울이지 못해 뼈아팠던 마음의 말도 있고, 차마 하지 못한 사이의 언어들도 있다. 좋아서 밑줄 친 말도 있고, 너무 아려서 반사해 버린 말도 있다.

시인이 모든 직업에 스며들어서 홀로 빛나는 모든 것들을 지칭하듯이, 모든 말에도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비탄이며 하는 감정들이 스며들어 있다. 웃음 나고 눈물 나는 것들이 모두 말의 분비물이다. 무언가에 스며들어 섞인 것들은 반드시 결합해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나의 글들은 ‘언어의 화학’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어렵지는 않다. 나는 화학자도 천체물리학자도 아니기에 일상의 언어로 나긋나긋 자분자분 쓰려고 마음을 기울였다. 물론 내 말이 정답은 아니다. 산다는 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언어로 삶을 정의하는 일이라서, 나는 나의 생각과 나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정의를 내렸을 따름이다. 황당하다고 힐난하거나 틀리다고 단정하지 말고, 독특하고 색다르다고 받아들여 준다면 기쁘고 안심되고 보람 있겠다.   

  

 긋기는 인간의 오랜 습벽이다. 별들을 가만두지 못하고 줄을 그어 별자리를 만들고 그에 어울리는 신화를 지어낸다. 그뿐인가.  개념  개념에 줄을 그어 없던 학문을 만들어내고 진보를 거듭한다.  지구인을 ‘랜선으로 연결해 새로운 국경,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낸다. 인생이란 어떤 사람에게 선을 잇고 어떤 언어에 줄을 그을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세상의 많고 많은 말들 중에 내가 밑줄을 그은 말들이 나의 언어가 된다.   안에 쓸모 있는 문장들이 있어서   줄이라도 그대의 것이 된다면, 나는 메밀꽃처럼 환히 흐드러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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