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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콤보 Apr 15. 2022

부캐 수난시대

며칠 전 일이다. 퇴근 후에 집에 네 시반쯤 도착했는데 아파트 복도 현관문 앞에 택배가 8개쯤 놓여 있었다. 와이프와 내가 각자 구매한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던 물건들이 왔구나'하는 기쁨도 잠시 난 주저 없이 빈손으로 집안으로 들어갔고, 이내 컴퓨터를 켜서 부캐 업무를 시작했다.


그날은 클라이언트와 통화할 급한 일도 있었고, 전반적으로 일이 많은 날이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안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일을 하다 보면 파트너들의 업무시간에 맞춰야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서비스를 사용하는 경우 여섯 시까지만 고객센터가 운영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통상적인 업무시간까지는 나도 부캐 업무에 전념하고 싶었다. 


역대급 택배 물건들을 복도에 방치한 채 부캐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여섯 시가 넘었고, 와이프가 퇴근하며 들어오는 소리에 현관으로 향했다.


"일찍 왔으면 이것들 좀 치웠어야지"


짜증 섞인 와이프의 목소리와 표정에 나도 마음에서 갑자기 화가 일었다.


"내가 놀면서 그런 거야? 나 일했잖아"


비슷한 상황이 몇 번 있었을 때마다 쌓여왔던 감정들이 폭발하며 나도 짜증을 내버렸다.

사실 내가 구매한 물건들이야 별것들이 아니었다. 대부분 공산품이었고, 급하게 들여놔야 할 이유도, 당장 뜯어볼 이유도 없었다.

다만, 와이프가 주문한 것들은 내가 알지 못했다. 아이스박스도 하나 있는 것으로 봐선 식품류가 포함된 듯했다.


"최소한 냉동제품은 바로 넣어놨어야지"

와이프의 말에 내가 대꾸했다.


"아니 냉동 겨우 두 시간 더 그렇게 있는다고 상하냐고, 집에 있는 식재료들이나 상하게 하지 말던지"


얼마 전 애플망고, 고구마, 천혜향 등 제때 먹거나 냉장고에 넣지 않아 버린 식재료가 떠올라 한마디 덧붙였다.


와이프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 여름도 아니고 아이스박스에 담겨 저렇게 배송되었으면 내가 집에 들어온 시간이나 본인이 도착한 시간이나 식품은 멀쩡 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서운했을 것이다. 그저 일한다는 핑계 하나 가 그 어느 것보다 우선시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난 부캐 활동을 해왔다. 대부분 사이드잡이었는데 결혼 상대자를 찾는 과정에서도 난 이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결혼 후에도 지지해 줄 것에 동의를 구했다.


그때 쿨하게 동의했던 여자 친구는 결혼하면 조금 더 열렬한 나의 사이드잡 지지자가 되어줄 거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전 신혼집에 미리 들어가게 된 우리는 예비부부생활을 해볼 수 있었다. 서로 결혼 준비로 예민해진 시기이긴 하나, 와이프는 부캐 활동에 시간을 쓰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일생에 한번 있는 이벤트인데 남편이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상황'이라는 것의 해석이 정말 중요하다. 이것에 대한 와이프와 나의 해석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난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의 해석은 이렇다. 

일반적인 프리랜서나 사이드잡 사업가에겐 이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상황은 대개 돈벌이를 하는 행위이다. 이 돈벌이 행위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만 잘 먹고 잘살기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들이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오는 것과 같이, 나 또한  사이드잡을 위한 시간이다. 더욱이 나의 여가시간을 포기하면서까지 추가적인 근무를 집에서 하는 것이다. 이는 더 고귀한 가족을 위한 헌신이 조금 더 담겨있다는 의미이다.


반면 와이프의 해석은 이렇다.

나는 집에 와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는 남편과 같았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일을 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상황이더라도 단지 와이프의 눈에는 컴퓨터 게임을 하는 남편, 컴퓨터 앞에 앉아 아이돌 뮤비나 계속 보고 있는 한심한 남편과 같은 모습으로 생각한다.

즉,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고 있건, 게임을 하건, 야동을 보고 있건 간에 내 눈에는 집안일 안 도와주고, 나랑 안 놀아주는 남편이 되는 것이다.


아뿔싸, 결혼 전 청첩 인사를 다닐 때 만난 유부남 친구가 떠올랐다. 재택근무를 하는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는 친구는 집을 놔두고 집 앞의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개발자인 친구는 집에서는 일할수 없다고 했다. 와이프와 딸아이 때문인 듯했다. 


다행히 그날 서로의 짜증 섞인 말로 잠시 냉랭했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좋아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난 집에서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빨리 부캐 활동을 안정화시켜서 나의 퇴사 시점을 더 앞당기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부캐가 본캐가 되어 사무실에 출근해서 일할 것이며, 집에서 일하는 나를 더 이상 보여주지 않을 수 있다. 여느 가장들처럼 나의 부캐도 비로소 한 가정의 아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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