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벌어진 결과를 두고 “이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저랬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을 한다. 상상에는 있었던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없었던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창조되기도 하고, 미미한 사건이 중요한 사건으로 변모되기도 한다. 또한 중심인물들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기도 하고, 아예 사건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많이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은, 상세한 기록이 없는 옛 사건의 결과를 두고 사건의 주축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다방면으로 추측하여 결과에 걸맞은 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은 많지만 새로운 국가의 창업만큼 큰 사건은 없다. 그중 조선의 창업은 이전의 새로운 국가 건설과는 차이가 있다. 큰 전쟁도 없었고 국가의 혼란을 틈타 생겨난 신생국이 국토를 통일하는 과정도 없었다. 비교적 평화롭게 전 왕조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 형식이었다.
여기에 두 중심인물이 있었다. 이성계와 정도전.
이들은 고려말, 조선초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만남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만남이 그러했듯 새로운 역사의 흐름을 결정했다.
1383년 고려 우왕 9년 중앙 정치권에서 밀려난 추레한 사대부 하나가 함흥에 주둔 중인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의 군막을 찾아갔다.
그의 이름은 정도전, 42세로 공민왕 때 중앙에 진출했던 신진사대부였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친원정책과 같은 보수 반동 정치가 시작되면서 친명정책을 지지하던 신진사대부들이 숙청되었는데 그도 우왕의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다가 유배를 가게 됐다.
3년간의 전라도 나주에서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풀려났지만 중앙 정부는 더 이상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그는 3·4년간의 지방을 전전하는 야인 생활 끝에 이성계를 찾았다. 유배에서 풀린 시점과 이성계를 찾았던 시점의 간격으로 보아, 그도 살 길을 찾아 무언가를 끝없이 도모했을 것이고 그러한 그의 도모가 생각대로 잘 들어맞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된다. 글 읽는 선비에게 다시금 관직의 길이 열리지 않았으니 그로서는 궁지에 몰렸을 수도 있다. 이성계를 찾은 것이 그의 몇 번째 도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마지막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때 그의 나이 40대 초반이었고 이성계의 나이는 40대 후반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혁명에 대해 얘기를 나눴을까? 알 수는 없지만 왕조 교체와 같은 극단적 이야기까지는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권문세족의 부패, 백성들의 어려움, 동북아 정세 등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정도전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이끌면서 이성계의 생각을 엿보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일치되는 견해에 대해서는 정도전의 좀 더 과감한 질의가 있었을 것이다.
“장군, 장군은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렇게 잘 훈련된 군사가 있으니 세상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라도 하겠소, 그게 무슨 뜻이오?”
상대방의 심중을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그들은 서로의 의중을 넌지시 파악하는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오해라니요, 제 말은 이 정도의 군사라면 어떤 규모의 왜구가 침략한들 못 물리치겠냐는 뜻이었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짧은 대화로 이들은 서로가 의기투합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의 의기투합이란 현 시국을 바꿔야 되겠다는 개혁에 대한 공감이지 그 이상의 공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혁을 넘어선 문제에 대해선 서로의 생각이 달랐을 수 있다.
이성계가 급진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정도전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왕조 교체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많이 나가야 1170년 고려 의종 때 일어난 무신정변 정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군사정변을 일으켜 권문세족과 같은 간신들을 없애고, 공민왕이 추구했던 개혁정책을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추진해 나가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서 이러한 생각을 나눴다는 기록도 없고 이러한 생각이 역모에 엮일 수도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자신의 뜻을 꺼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성계에게 만은 꼭 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현실적 배경을 찾았을 것이고, 그런 그의 생각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이성계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성계는 정도전이 타도하려고 했던 기득권과의 연결고리가 없으면서도 무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개혁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한 문인과 개혁을 추진할 힘이 있었던 한 무인이 이렇게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서로 보완하면서 개혁을 추진하였고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왕조 조선을 창업하였다. 만난 지 9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