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물을 잘 죽이는 사람이다. 원래도 꾸준함과 거리가 먼 사람인데 동물과 다르게 식물은 소리도 내지 않으니 3일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 들여다보는 일을 잊어버리곤 한다. 어느날 창가에 내놨던 화분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서 들여다보면 시들시들하고 있기에 다시 살려보겠다고 열심히 돌보면, 반대로 너무 열심히 돌봐서 또 뿌리나 줄기가 썩어버리고 만다. 식물이 나에게 필요로하는 '적당한 관심'의 그 적당의 수준을 맞추기가 어렵다.
어릴때부터 집에는 화분이 많았다. 아버지는 그 화분에 물을 주는 주기를 잘 알았다. 잎을 보면 얘가 물이 많은지 적은지, 햇빛이 부족한지 흙을 바꿔줘야하는지 한눈에 판단했다. 반면에 나와 오빠는 집 안에서 공놀이를 하다가 줄넘기를 하다가 화분을 엎고 깨기가 일반이었다. 아빠가 퇴근하기 전에 엎어진 화분을 다시 잘 세우고 흙을 다시 덮어놔도 아빠는 바로 알아채셨다. 들킬까봐 콩닥거리며 덮어놓은 화분은 아빠의 손에 다시 제대로 심겨지곤 했다. 엄마는 오며가며 화분에 자꾸 물을 줬다. 화분이 왠지 말라보인다며 물을 마시다가 화분에 양보하곤 했다. 필요한 양보다 많은 물을 머금은 흙 때문에 식물뿌리가 흔들거렸다. 아빠는 엄마와 우리 남매에게 항상 신신당부했다. '화분에 아무것도 하지마.'
나의 식물감각은 아빠도 엄마도 닮지 않았다. 방 한쪽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자꾸 까먹는다. 두세달에 한번만 물을 줘도 된다는 선인장마저도 말려죽였다. 어느날 빼쩍 말라 뼈밖에 남지않은 선인장의 뾰족한 가시를 발견하던 그 황당함이라니. 그래서 누군가 선물로 화분을 주면 마음이 불편했다. '이 생명을 내가 죽이지 않아야할텐데..' 그래서 나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사무실에 화분이 없거나, 있다면 화분을 돌보는 분이 주기적으로 와주는 곳이었다.
그런 내가 이번 봄에 자의적으로 씨앗을 심었다. 딸기와 코스모스 씨앗을 작은 화분에 각각 심었다. 3일에 한번씩 물을 주며 2~3주 뒤에 나올 싹을 기다리고 있다. '나혼자 산다'에 나오는 키나 박세리언니처럼 제대로 된 화단은 없지만, 작은 화분에 꽃한송이 피워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또 어떤가. 못하는 것도 한번씩 해보는 거지. 만약에 성공한다면 묵혀둔 숙제를 해낸것처럼 굉장히 뿌듯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