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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라 Jul 16. 2020

소우주의 안밖을 넘나들며

될 일은 되고 안될 일도 된다

살면서 스트레스 상황이 계속되거나 받은 스트레스를 즉시에 적절히 풀지 못하면 마음이 피곤해지고 덩달아 생각이 많아져 몸까지 쉽게 지치곤 했다. 한데 몇 해 전부터 명상을 시작하면서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려 하다 보니 요즘에는 평화로운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알아차림의 안테나를 항시 켜두고자 노력하다 보니 느낌이나 생각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느낌과 생각들에 전처럼 오래 끌려 다니지 않으니 무상심심의 시간이 점점 늘어간다. 발코니의 식물들을 돌보고 어루만지며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할 때에는 그릇을 닦으며 그릇 속에서 지수화풍의 네가지 요소를 찾아보기도 한다. 강이지의 털을 빗겨줄 때에는 아플 새라 더욱 살살 빗겨주게 되고 눈을 맞추어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도 본다.  실수로 강아지 꼬리를 밟으면 많이 사과를 하고 어디 나갈 때엔 장황히 설명도 해주게 된다. 이발소에서 손님의 머리를 손질해 주면서 머리카락의 지수화풍을 헤아려보고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가 모근과 두피, 두피 밑의 내피와 얇은 지방질과 핏줄들을 따라 더 들어가 본다. 머리뼈가 보이고 그 두꺼운 두개골을 통과해 더 들어가면 회색의 뇌가 나타난다. 느낌은 물렁물렁할 테고 점액질로 번들거리는 것도 보인다. 그 속에 이 손님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다 저장되어 있으며 모든 각 기관들이 알아서 조직적으로 일을 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놀랍고 신비롭다. 경외감이 들어 그 우주 거죽을 다듬는 손길에 저절로 정성이 들어간다. 모양을 바꾸어 혹은 모양 있음이나 모양 없음을 바꾸어가면서 그의 존재함은 계속되리라. 불생불멸 불구부정 비상 비비상.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세상 나이랑 상관없이 언제나 그대로인 이유는 상이 있는 육체는 세월을 따라 쇄락해가도 상이 없는 마음은 존재함이라는 '있음'을 계속해 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서고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면 원하는 곳 어디건 갈 수 있고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어 몸이 바쁠 일은 갈수록 없어진다 . 무엇이건 생각하자마자 바로 떠오르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멍하니 앉거나 또는 편안히 누워서 호흡을 관 하는 것도 전혀 심심치않다. 명상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척이나 행복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일상은 똑같고 눈앞에 있는 것은 언제나 눈앞에 있을 뿐이고 일하고 먹고 자고 늘 똑같은 행위의 반복이다.  그러다가 누구한테서 한마디 들으면 생각 속에서 눈덩이처럼 저절로 커져 호수처럼 잔잔했다가도 갑자기 파도가 친다. 사실 그 한마디는 별 뜻 없이 그냥 내뱉은 것이고 그 쪽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잊었을텐데 스스로 화살에 맞았다고 생각하고 계속 자기 자신을 연거퍼 찔러 대니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기분이란 언제든지 바뀌게 마련이지만 외적인 요인에 따라 기뻤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하면서 계속해서 키질을 당하는 것이 억울했고 싫었다. 밖에서 아무리 키질을 해대도 그에 맞춰 들뛰고 날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괴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젊을 때부터 해왔다. 어차피 일은 이미 벌어졌고 안 벌어진 때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 일로 괴로워해 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괴로워하는 당사자만 계속 죽어나는 것인데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래서 성경책도 꾸준히 읽으며 교회에서 기도도 열심히 했었는데 그것이 그때에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언제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 하나님을 부르면 잠시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다. 한데 언제나 뭔가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매달리는 식의 기도가 힘들고 불편하여 언제부터인가 기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더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다 접어버리고 그저 마음 하나만 늘 편안하기만을 바랬었다. 그즈음 조건과 상황이 맞춰져 명상호흡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평화롭고 심심한 맛이 좋아져 학교 때 꽂혔던 불교공부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유튜브로 좋은 강의와 법문을 낮이나 밤이나 틀어 놓고 들었다. 태블릿 볼륨을 작게 해 놓고 잠드는 것이 좋았고 새벽에 일어나 잇대어 들으면서 멘토들의  강의에 풍덩 빠져서 살았다.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명상, 요가, 백팔 배, 반야심경, 천수경, 다라니 독송 등을 아무때건 할 수있어 싱글 인생이 너무 좋았다. 눈으로 뭔가를 계속 보는 것은 피곤한 노릇이나 눈을 감고 소리만 듣는 것은 참으로 편안하다.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뇌가 바삐 움직여야 하지만 눈을 감으면 그 자체로 쉼이 된다. 눈을 감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눈꺼풀 안쪽이 보인다. 커텐처럼. 어떤 분이 안쪽 눈꺼풀을 보면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 구멍을 찾아보는 것이 간화선이라기에  몇 번인가 해보았다. 생각은 고요해졌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발코니의 풍경소리가 들리기에 그 소리 구멍을 찾다가 잠든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아직도 못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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