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진정한 영웅
나는 천천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거칠고 딱딱한 박물관의 콘크리트 외벽과는 달리 안은 그저 새하얀, 투명한 공간이었다. 전시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자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그저 하얀 현실.
보존자들을 위한 문화 보존 5법칙을 만든 건 분명 문화보존기구다. 하지만 그 문화 보존 5법칙은 마스터피스의 유언에서 나온 그의 마지막 말에서 따왔다. 이 박물관에 들어서기 전, 입구 벽에 새겨진 글자들을 봤을 것이다. 그가 세상을 뜬 지는 꽤 되었지만 그가 도시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스터피스는 CIS 소속으로 지금의 메개융합시술의 시초였던 기억파편 기술을 처음 기획하고 개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 기술은 인류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도시에서 퇴출되었고, 지금은 사용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는 이것 말고도 인류에게 CIS 만큼이나 굉장한 영향을 주었기에 그도 메개융합시술을 받았을 것 같지만, 정작 마스터피스 본인은 시술받지 않았다. 즉 CIS에 소속된 사람들 중 유일하게 메개융합시술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었다는 거다. 그의 영향력은 지금의 CIS보다 더 컸다. 당장에 CIS 국제연구센터 건물만 봐도 알 수 있다. 거대한 크기의 센터 건물에 아주 큰 그의 조각상이 박혀 있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가 완성하지 못하고 남긴 유작은 아직까지도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있을 만큼 유명하다.
'저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도시 중앙에 위치한 CIS 국제연구센터의 거대한 정육면체 건물 유리창들 사이 마스터피스를 헌정하는 듯한 망원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망원경은 마스터피스가 생전 살았던 자신의 집 거실에 하늘을 올려보기 위해 설치된 천체망원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도시 외곽 끝에서도 보인다는 이 조각상의 크기는 마스터피스를 완벽하게 영웅으로 추앙했다.
마스터피스가 남긴 것은 돈도, 추억도, 보물도 아니었다. 굉장한 두께의 설계도 몇 장이었고, CIS는 가족들로부터 이를 양도받아 이곳, 문화보존기구 박물관에 전시했다.
나는 그저 새하얀 공간 깊숙이 걸어 들어간다.
그림자도 없고,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새하얀 공간은 문화보존기구의 캐치프레이즈인 'Everything 모든 것.'과 역사박물관의 기조인 '우리는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역사는 그런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연출된 공간이다. 또 '모든 것'과 '역사'에 대한 관점에 따라 사람마다 그 공간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한다. 대체로 그저 '흰' 것에 압도되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느껴진다.
바로 마스터피스의 전시 공간으로 간다.
"제0-특별전시관, 마스터피스 미지"
이 전시관 마스터피스를 위한 전시 공간이다. 오직 두꺼운 낡은 책만 전시되어 있는데, 자유롭게 넘겨보며 관람할 수 있었다. 본래 하나의 책이었지만, 너무 두꺼워 관람자들의 편의를 위해 설계도 별로 쪼개어 전시되어 있다.
'아직도 해석되지 않았다니, 참으로 신기하지. 마스터피스는 진짜 미래에서 왔을까? 메개융합시술의 위험성을 알고 시술을 받지 않았을까?'
마스터피스가 남긴 설계도 '미지'는 지금까지도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CIS에서 계속 해석 중이긴 하지만 해석된 건 고작 2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이론으로만 가능한 설계도지만 실제 적용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미지' 설계도는 고작 2퍼센트의 해석률이지만, 도시에 굉장한 영향을 줬다. 유일하게 완벽 해석된 설계도인 '무중력 실공간화'는 중력 공간에,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독립적인 무중력 공간을 끼워 넣는 개념인데 이 것이 적용된 곳은 다인복합승강장이다. 총 207종의 기동차량이 지나가고, 매주 약 25만 대의 기동차량으로 승하차하며, 매일 약 560만 명이 이용하는 초거대 복합승강장이다. 나도 박물관에 오기 위해 승강장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왔기에 아주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차락.
다음 장으로 쪽을 넘긴다.
No.24 시간여행, 나는 과거에서 왔다.
설계도에는 어떤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스터피스 본인만의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번호가 매겨져 있었는데 23번째 설계도였던 '무중력 실공간화'가 제일 먼저 해석된 것을 본다면 해석의 난이도 순서는 아닌 것 같다.
'제가 준비한 설계도 중 가장 큰 포인트는 시간여행이죠. 나머지 23개의 설계도가 해석된다면 마지막 24번째인 시간여행 설계도는 알아서 풀리게 될 거예요. 23개의 설계도는 이 시간여행을 위해 달려온 준비과정에 불과합니다. 저의 미지가 또 다른 미지로 여러분들을 이끌게 되는 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기대하며 여행의 끝자락 저를 만나러 오길 기다리겠습니다.'
과거로 자신을 만나러 오길 기대하는 마스터피스의 끝말을 마지막으로 설계도는 끝난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마스터피스는 자신이 직접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고 증명해 냈다. 그것이 극점전쟁 이전이든 이후든 상관없이 절대 불가능할 거라던 그였다.
'들었어? 오늘 여기에 XXX 온다는데?'
아는 누군가의 이름이 들린다.
'그래? 왜?'
'아니, 셀리나가 그렇게 눈독을 들였다나 봐. 유천성이 제시한 계약 조건 때문에 셀리나도 환장했다고.'
'그게 박물관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
'유천성 능력계가 환각이잖아. '흰'을 보러 온데.'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였지만, 하필 그의 이름이 들린다.
'유천성...이 여길 온다고?'
그가 나를 피한 건지, 내가 그를 피한 건지 모르겠는 15년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의 형 되는 유세성이고, 그는 내 남동생 되는 유천성이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떨어져 지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무 연락도 없이 살던 게 15년이다.
천성이는 환각계 능력자다. 등급은 모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면 꽤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다. 뉴스 보면 꽤 큰 레이드도 참여하고, 그 유명한 셀리나 밑에서 훈련을 받았으니 인지도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인 것 같고.
'흰? 은 누구지?'
'나도 잘 모르는데, 유출된 거 보면 박물관 관장인 듯.'
'아... 곧 통제되겠네?'
'그렇지, 뭐. 우리도 그냥 나가자.'
'나중에 오지 뭐.'
그들이 밖으로 나갔다.
'나도 딱히... 볼 생각은 없지.'
조용히 구경할 생각에 들뜬 마음을 접고, 박물관 밖으로 나간다.
꺄아악.
이미 밖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 무리 너머 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정신없는 사람무리 대신 멀리 돌아가기로 한다. 가까운 박물관 앞 대신 뒤로 돌아간다. 시끌시끌한 사람 소음 뒤로 조용하고 편안한 공원을 따라 걷는다.
'보고 싶지도 않았나 봐. 아니면, 별로 궁금하지 않은 건가. 뭐, 이젠 상관없는 사이인가.'
떨어져 지낸 15년의 시간 속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4살의 나이 차이와 이름, 능력뿐이었다. 형제라 부를 수 있는 관계도 아닌 것 같다.
'... 출현. ...하십시오.'
'... 출현. ...하십시오.'
갑자기 누군가 나를 향해 달려오다 몸을 치고 지나갔다.
"아!"
'뭐야, 진짜. 눈 좀 제대로...'
그를 향해 돌아본 순간 내가 마주친 건 아수라장이 된 박물관과 공원이었다.
'H급 크리쳐 일루젼피쉬 출현. 구조연락을 취했습니다. 시민들은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하십시오.'
'H급 크리쳐 일루젼피쉬 출현. 길드연락을 취했습니다. 거주 A, B구역, 도킹 A구역 시민들은 가까운 대피소로 이동하십시오.'
거대한 해파리가 떨어졌다. 하나뿐이면 모를까 수십 개의 해파리가 꿈틀대며 공격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공격이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건물을 통째로 감싼 그의 거대한 몸집에 압도당했다.
'살려줘...어어'
누가 소리쳤다.
'제발, 누가 나 좀 꺼내줘...어어'
해파리의 촉수에 당한 사람들일까.
'나는 능력자가 아니니까 능력자들이 오면 알아서 처리하겠지. 나는 멀어지는 게 그들을 돕는 거고, 피해를 줄일 수 있어. 대피하라고 했으니 가까운 대피소로 가면 되겠지.'
나는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 뛴다. 도망쳐 내려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발견한 그 순간, 허벅지에서 무언의 이상함이 느껴진다.
촥!
"촥?"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태양의 강렬한 빛을 가리는 거대한 해파리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내 다리를 감싼 그의 촉수는 천천히 나를 탐하기 시작했고, 파고드는 까끌함에 벗어나기가 힘들다.
'어떡하지?'
"비켜."
익숙한 목소리가 내 오른손을 잡아 뒤로 세게 끌어당겼다. 촉수의 까끌함이 허벅지를 타고 흔적을 남겼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와 마주쳤다.
"어?"
나를 알아본 듯한 그의 표정. 하지만 이내 흐물흐물 두꺼운 촉수들이 끼얹어지며 시선을 차단시켰다.
'천성이가 나를 알아본 건가? 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멍하니 그의 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구조요원이 올라와 나를 감싸 안는다.
'눈 감으세요. 해파리의 공격이 거셉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해파리의 공격은 촉수가 아니라고 한다. 촉수는 능력을 전달하는 용도일 뿐, 공격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해파리도 환각 능력을 갖고 있는데, 촉수에 닿은 살아있는 생명체에겐 특별한 환상을 보여준다고 한다.
쿠릉 쾅!
번개의 우렛소리와 같은 굉음과 함께 뭔가 엄청난 것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검게 물들이는 무언가가 이곳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저기 뭔가 떨어져!! 다들 조심해!!"
구름 사이 보이는 건 작은 파티클이었지만, 구름에 드리운 그림자는 거대했다. 이토록 더러운 기운이라니 절대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유천성 혼자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하지만 대형길드에 연락했다던 협회의 소식은 아직 없고, 그의 곁엔 그를 돕는 듯한 여성 한 명뿐이었다.
쿠릉 쾅! 마치 동물의 우렁찬 울음소리 같은 또 다른 기괴존재가 해파리와 유천성이 벌이는 한복판으로 떨어지고 만다. 해파리는 깔려 죽어버렸고, 이번엔 새로운 기괴존재와 마주했다.
'저건...'
"재해급이야! 어서 도움 요청해! 내가 일단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게!"
현장에서 멀어지는 와중에도 똑똑히 들리는 천성이의 다급한 신호였다. 그는 뒤에 있던 여자에게 소리쳤고, 바로 기괴존재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프수우우우스악-!
바로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기동차량이다. 도움 요청을 받은 길드인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현장에 투입되는 능력자들, 먼저 버티고 있던 천성이로부터 커넥팅을 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대피소로 내려갔다.
대피소에 도착한 나는 바로 내려가 긴급 승강장에서 집으로 가는 모노레일을 탔다.
'재해급 크리쳐 데인델라이온 출현. 현성길드 현장 도착하였습니다. 모든 시민들을 안전하게 긴급구조하였습니다.'
도움 요청을 받았다던 현성길드가 현장에 도착해 천성이와 싸우고 있고, 근방에 있던 모든 시민들을 모두 긴급 구조하였다는 협회의 연락이 온다.
'아름답네...'
크리쳐 데인델라이온은 사자의 모습에 머리 위로 민들레를 취한 형태였다. 번개의 우렛소리와 비슷했던 굉음은 아마도 이 사자의 울음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공격은 머리 위 놓인 민들레 씨앗을 퍼뜨리는 거였는데, 딱히 엄청난 공격이 아닐 것 같다는 예상을 모두 깨뜨리고 그 씨앗은 일정 거리를 날아가다 폭발하며 주위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때마다 천성이가 민들레 씨앗으로 환각을 일으키며 늦게 도착해 상황을 파악하는 다른 능력자들을 보호해주고 있었다.
천성이의 능력은 환각계 능력이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지 정확히 무슨 능력인지는 몰랐다. 거대한 괴수와 싸우는 그의 모습을 실로 아름다웠다. 크리쳐 주변에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날아다니던 그는 공격형 능력자가 아닌 서포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까지의 능력자들 사이에서 서포터는, 또는 서포팅 능력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저 무력으로 무찌르기만 하면 되는 크리쳐들과의 싸움 속 강한 자만 데려가려는 길드의 속내에서 서포터는 무참히 버려졌다. 어쩌면 15년의 세월 속 천성이가 외면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