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게 만드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너 편안해보인다.
친구가 웃었다. 그런가? 딱히 바뀐 건 없는데. 머쓱해하는 내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응, 좋아보여.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지. 잘 생각해봐.
나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다. 20대 초반, 설레고 떨려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던 연애 중에도 나는 내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면 헤어졌다. 내가 너무나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이라도, 나를 지치고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면 결국 끝냈다. 어쩌면 너무나 편안하고 과분한 연애로 스타트를 끊은 까닭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나를 죽여가면서까지 굳이 만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어느 한 쪽이 비굴해지지 않아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연애가 실재로 존재한다는 것을 일찍 알아버렸는지도.
누군가를 떼어내는 일은 나에게도 절대 쉽지 않았다. 머리로는 아닌 걸 알아도 가슴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머리의 지시를 쉽게 따를 수 있을까. 이별을 결단한 그 순간조차, 질척이는 감정들은 내 발목을 끝까지 잡았다.
너 잘 생각해야해, 앞으로 저런 사람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세상에서 남자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친구들 봐, 하나둘씩 결혼하잖아. 이제 너 나이도 생각해야지. 언제 또다시 처음부터 연애할래?
원래 사랑이란 다 힘든거야. 너의 첫 연애만 특이했을 뿐, 원래는 지금처럼 네 모습을 죽이고 상대방에게 맞춰가야 하는 거야. 그게 사랑이야. 20대 때 이런 연애도 한 번 해봐야지.
그래도 나는 결국 도려냈다. 내게 맞지 않은 사랑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랑이 내게 맞는 사랑인지 가려내는 나만의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함께 있으면서 변해가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랑은 '틀린 사랑이었다'.
사랑을 하면서 나는 변했다. 밝은 자신감에 넘쳐 그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고, 한없이 들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기도 했다. 점차 자신없고 주눅든 여자가 되기도 했고, 겁이 많아지거나 눈치만 보는 초라한 여자가 되기도 했다. 이들 중 어떤 사랑이 내게 맞는 사랑일까? 답은 명확했다. 나를 가치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면 굳이 만날 이유가 없었다. 너 변했어, 뭔가 걱정이 많은 눈빛이 되었는데? 걱정하는 친구의 말을 듣기도 전에 내 이성은 이미 감성의 끈을 끊어냈다.
사랑을 하다보면 두 사람 모두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고, 빛나거나 초라해진다. 당당해지거나 소심해지기도, 편안해지거나 불안해지기도 한다. 나를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나에게 맞는 사랑이 아니다. 짧은 만남에서 이미 나를 마이너스로 만드는데, 만남이 길어지면 나는 얼마나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스스로의 판단이 어려우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변해가는 내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 나는 여전히 사랑받고 빛나야 하는 소중한 존재다. 나를 지키기 위해 때론 냉철한 이성의 작용이 필요하다.
물론 불안한 적도 있다. 날 편안하게 해주고 빛나게 해주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연애를 실패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졌기 때문에. 나를 억누르면서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 사람이라도 만나야 했나. 그냥 내가 더 참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럴때마다 내 이성은 말했다. 그런 사람을 만날 바에야 혼자 살면서 내 스스로를 더 빛나게 하는 게 백배는 더 낫다고. 내면과 외모를 갈고 닦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는 편이 훨씬 좋다고. 굳이 누군가가 옆에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엔 만났다. 나를 예전보다 훨씬 더 빛나게 하는 사람을.
그러게, 생각해보니 그사람 덕분이네. 나는 찻잔 끝을 빙빙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다시는 그런 사람 못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만났어. 요즘은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로워졌어.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 똑같은 말을 했다. 너 편안해보인다, 좋아보여. 내 스스로도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나의 변화가 지인들에게도 보인다는 것은 참 긍정적인 일이다. 나를 어둡게 만들어가는 사람과 냉정하게 이별했기에 나를 밝게 만들어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아닌 사랑이라면, 다가올 '맞는 사랑'을 위해 냉정하게 끊어내야 한다. 맞다, 때론 그 아픈 냉정함이 가장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