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ana - Logrono
겨우
대도시인 Logrono 까지 가는 길은 '겨우' 8km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하는 마음이 가볍다. 파리 로댕 박물관, 루브르의 도록의 치명적인 유혹에 빠져서 여기까지 들고 왔지만 한국의 집으로 부칠 수 있어서 좋다. 여태까지 내내 걷느라 무리했던 몸을 느긋하게 뉘면서 쉬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계획이라 더욱 설렌다.
겨우 8km인데도 왜 항상 가는 길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벌써 일주일째 걷고 있고, 익숙해지면 쉬워질 줄 알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달라지는 건 20km라는 거리가 아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한국에서 하프 마라톤을 뛸 때는 2시간 반 만에 21km를 완주했으니까, 짐을 가지고 걷는 20km도 (물론 힘들기야 하겠지만) 괜찮지 않을까 -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다. 명백한 착각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많았는데 해가 뜨면서 구름을 어둡게 물들였다. 평소의 하늘은 언제나 스페인 하늘다웠는데 이 모습은 한국에서 해가 뜨는 모습 같았다. 구름이 몽글몽글한 하늘은 아무래도 한국 같고, 하늘이 유달리 높아 보이고 구름이 없거나 적으면 스페인 같은 느낌이 든다.
이내 해가 다 떴고 다리를 건너면서 아래로 차가 쌩쌩 지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항상 내가 이 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싶기도 하고. 머리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면서 달려오던 차와 정면으로 부딪혀 팝콘처럼, 새총 고무줄로 튕겨진 조약돌처럼,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퐁 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튀어 오르겠지.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면 몇 년 전 여의도 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발 디딜 틈 없이 바글거리는 선유도의 다리 위에 간신히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바글거리는 다리, 왁자지껄한 소리, 펑펑 터지는 불꽃, 밤인데도 얼굴들을 비추는 폭죽의 밝기, 길바닥에 널브러진 온갖 쓰레기, 놓칠까 봐 굳게 잡은 땀에 절어 끈적거리는 손. 이런 요소들이 부조화로 느껴졌다. 그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말에 관한 말
Rioja는 예전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한참 햇빛을 쬐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던 친구와 나는 입장시간을 넘겼기에 궁전 안의 정원인 Generalife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저거 뭐라고 읽어? 제네럴라이프야?"
"그렇게 읽는 거 맞아?"
"몰라. 일반적인 삶이라는 거야? 이름 웃기다!"
헤네랄리페로 읽는 것을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다. 배꼽이 빠지도록 웃어댔다.
이름이나 명칭에 관심이 없는 Y는 항상 그래 왔듯이 지명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Logrono를 기억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로그로뇨 대신 로그뇨라고 불렀고, Y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굳이 그 지명을 고쳐주는 내 오지랖이 신경 쓰였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데 Y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내 생각이나 가치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의문이 들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는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도시로 가는 길에 예쁘고 자그마한 공원을 지났다.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에 있던 회색 약수터(도무지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분수도 아니고, 약수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지하수 펌프쯤 될 텐데. 그 느낌이 아니지 않은가)를 지나면서 물도 채우고 주변도 구경했다.
아직 아침인데!
아직 아침인데 벌써 도시에 들어간다니! 도시에 들어가기 전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구름이 강을 가득 채웠고 그 모습은 몹시 아름다웠다. 강이 하늘을 흉내 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는 풍경인데 그 모습이 너무 생경하다. 주변에 신경을 안 쓰고 매일을 살고 있었나 보다. 하늘과 강이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모습이 모네의 인상주의 풍경화 같다.
대학순례자여권에 도장을 찍기 위해 아직 열지 않은 사무실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H와 P를 만났다. 걸음이 빠른 그들은 도장을 받자마자 도시를 나섰다.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기회가 될 때마다 세요를 받다 보니 벌써 10개가 넘었다. 각각의 도장들이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모으는 재미도 있고, 매일의 기록이 남는다는 게 되돌아보니 더 좋다. 아저씨 몸에 찍힌 문신과 내 도장과 같은 것도 있다.
시내구경
J와 Y, 그리고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경건한 느낌의 성당을 구경했다. 시내 구경이라고 하면 어쩐지 촌에 사는 사람이(시골보다는 촌이라는 어감이 어울리는 것 같다.) 읍내에 오랜만에 나와서 구경하는 느낌이다. 우리 순례자들은 순례의 90%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시작해 흙길을 하루 종일 걷고 다시 작은 도시에 도착해 눈을 붙인다. 가끔은 숙소가 하나도 없는 마을을 지나기도 하니까 촌사람이 맞는 것 같다.
30유로를 써서 배낭의 짐 2kg을 한국으로 보냈다. 이 나라에서도 돈을 아껴 썼는데 이렇게 택배비가 한 번에 왕창 나가는 건 어째 좀 억울하다. 프랑스에서 샀던 기념품 조금, 도록 2개, 잡다한 물건들. 값이 나가는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J가 그토록 좋아하는 납작복숭아와 체리는 당도가 높아, 손끝으로 잡고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손가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그 손은 너무 끈적거린다. 마트는 한국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인데, 까르푸는 한국에 왜 적응하지 못했을까.
처음 본 토블론 초콜릿 케이크를 보고 J와 Y에게 여기에만 있는 거니까 먹어야 한다며 졸랐다. 셋이 공원에 나란히 앉아서 초콜릿 케이크를 열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인데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다. 아이스크림 엔초의 바닐라맛 부분을 다 먹고난 뒤에 보이는 막대기를 감싼 두툼한 초콜릿바처럼 진하디 진하다.
시간의 기대
이제는 한국에 들어온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을 구경하고, 서점에 가서 까미노 책을 구경하고, 기대보다는 평범했던 양송이버섯구이를 먹고, 여유롭게 거리를 걸었다.
셋이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끊겨갈 때쯤 거리 풍경을 그렸다. 거리 풍경을 누가 더 잘 그렸는지 J에게 점수를 매겨달라고 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거리 풍경을 똑같이 그려,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환상적인 사진을 만들어내던데, 내 수준으로는 역부족이다. 길가에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들과 이야기하는 순간이 솜사탕 같다. 설탕으로 만든 여러 갈래의 실이 합쳐지면서 하나의 커다란 솜사탕을 만드는 것처럼 이 순간도 하나의 완성된 솜사탕이자 또 한 가닥의 얇은 실이다.
언제나 수많은 도움을 받고 산다. 까미노에 오면 독립심이 커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의지하고 있고 너무 정서적으로 기대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하나둘씩 가고, 그렇게 외롭게 혼자 남겨지는 상황이 두렵다. 의지하는 게 무서운데 자꾸 그렇게 된다. 다른 이들에게 자연스레 의지하고, 기대고 또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