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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Feb 23. 2020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2

다시 만난 세계


본문은 <삽입 된 슬리퍼 1 - 슬리퍼 삽입 사건>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zzyoun/85



발바닥을 구석구석 찬찬히 살폈다. 눌러도 보고 냄새도 맡았다. 내 발바닥을 이렇게 정성껏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눌린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11인치 남짓한 나의 족(足)의 세상 속에는 막 잠이 든 신생아의 얼굴처럼 태평성대가 가득했다. '이제 슬리퍼 니 놈 차례다' 알알이 박혀있는 돌들이 괜히 흉물스러워 보였다. 어릴 적 만화로 그려진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아르고스 이미지를 보았던 기억이 났다. 100개의 눈이 온몸을 뒤덮은 괴물을 보고 속이 메스꺼웠었던 기억. 지금이 정확히 그랬다. '혹시 나에게 환 공포증이 있나?' 조만간 관련된 의학 정보를 찾아보겠노라 다짐하며 '대한민국 원룸 신화'의 아르고스를 집어 들었다. 


본능적으로 집게와 엄지손가락만 사용했다. 악취가 풍기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집어 올릴 때처럼. 과학 수사대 요원들이 살인 현장의 핵심 증거물을 옮길 때처럼. 나는 그것을 상자에 도로 넣어 침대 깊숙이 박아 버렸다. 나체의 여인들이 독자를 유혹하고 있는 은밀한 서적을 보관할 때의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참담한 기분으로.


다시 신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슬리퍼 바닥에 충격을 가하면 삽입이 해제가 될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지만, 그것을 시험해보기 위해 다시 신는 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나는 그렇게 도전적인 사람이 아니다. 정도를 지킬 주 아는 사람이다. 5일이 지났다. 그날의 공포감이 힘을 잃어버려 가기 시작할 즈음, 녀석과 다시 만났다.


오전 8시쯤 기상 후 고시촌을 설렁설렁 한 바퀴 도는 게 나의 루틴이다. 언젠가 하루키가 매일 조깅과 수영을 하며 몸 관리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것이 인상 깊어 벤치마킹의 일환으로 시작했다. 훗날 입신양명을 하면 알리리라. '매일 아침 경보를 하며 삶의 곳곳에 녹아 있는 사람 냄새를 맡았어요. 하핫. 작가가 술만 마시고 담배만 뻑뻑 피울 줄 알죠? 직장인 보다 더욱 규칙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작가 지망생 여러분 명심하세요! 하핫' 멘트 죽인다. 천재형이 아닌 노력형인 것 같은 겸손함을 보이면서 동시에 은근히 천재미를 뿜뿜 뿜어내는 예술가가 된 나의 이미지를 그리니 흐뭇해졌다. '너 같이 뭘 좀 아는 놈이 스타가 되어야 되는데'  


40분 정도 걷고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아침식사를 했다. 견과류 몇 조각, 바나나 한 송이, 고구마 한 개면 충분한다. 식사 중간중간 오메가 한 알, 비타민 한 알 필수. 명심해야 한다. 음식이 내 몸이다.


한 잔의 차는 글 작업을 조력한다. 데운 물을 컵에 담고 티백을 우렸다. 카모마일 티. 카페인은 위장을 자극하고 잠을 방해한다. 숙면과 위에 좋다는 카모마일이 나와 맞다. 본격적인 작업 시작. 노트북에 앞에 앉아 공모 마감이 3달 담은 단편소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로 변신하는 이야기. 아직 어떤 가수로 변할지 정하지는 못했지만, 제목은 손쉽게 결정했다. <xxx 되기>. 


'제목이 신선하다고요? 하핫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하핫' 내 작품이 공모에 당선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인터뷰 중 나올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려 보았다. '제목에 대한 질문을 설마 한 명도 안 할까.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먼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얹어 주면 여러 예술에 골고루 능통한 사람처럼 보이려나?' 망상은 모든 준비하는 자들을 위한 마약이다. 


불현듯 그날 떠올랐던 환 공포증이 생각나 유튜브를 켰다. '30분만 찾아보고 작업 시작하자' 혹시 누군가 나를 게으르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이런 잡학들이 작가에겐 다 자양분입니다!' 


본격적인 정보 검색 전에 뭉쳐있던 유튜브 근육을 풀어야 한다. 예능 모음집 재생. 23번 이상 본 영상을 한 번 더 반복했다. 5분의 영상을 다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딱 내가 좋아하는 드립만 보면 된다. 이쯤되면 어느 시점에 그것이 나오는지 알기에 그 즈음 30초 앞 정도부터 재생 가능하다. 재생되는 영상 아래로 연관된 영상 목록이 보인다. 가끔은 재생 영상보다 목록 스크롤을 뒤적거리는 시간이 더 길 때가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엄지를 이용해 능숙하게 스크롤을 내리고 있는데, 순간 문제의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슬리퍼 삽입 사건의 원흉. 지압용 슬리퍼를 신고 줄넘기를 하던 그녀의 상하운동.


영상을 재생했다. 찌를듯한 고통을 안기는 혓바늘을 괜히 건드려보고 싶은 것과 동일한 충동. 왜일까. 영상을 보는 도중 문득 녀석이 궁금해졌다. '거기 잘 지내니?' 침대 아래에 손을 넣었다. 상자를 끄집어내 열어보니, 녀석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5일 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을 하고 있는 그것은 참 순해 보였다. '슬리퍼가 삽입되면 좀 어떤가. 고통을 좀 수반하겠지만 현대 의학이 알아서 해주겠지. 몸에 철심도 박는 세상인데' 나는 피가 맺히지 않을 정도로 살짝 베인 극미한 고통에도 온갖 오버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내 마음은 믿도 끝도 없는 용기로 뒤덮여 가고 있다. 흡사 절대반지에 눈이 돌아간 호빗들처럼.


다시 거기에 발을 넣을 준비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발 한 짝만 시험해 보자. 오른발과 왼발 중 어느 발을 넣는 것이 좋을까. 혹시 잘못돼서 발바닥을 약간 잘라내야 된다면 어느 발이 나을까?' 결론은 왼발. 샤워 후 거울에 비친 나의 신체를 떠올린 것이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왼쪽에 비해 오른쪽 어깨가 많이 기울어져 오른쪽 유두까지도 왼쪽에 비해 아래에 위치해 있는 내 몸. 왼쪽 다리가 살짝 짧아지는 게 한쪽으로 쏠린 몸의 균형을 맞춰줄 것이라는 나름의 철학이 선택의 동인이 되었다.


신었다. 기능은 여전했다. 돌들이 알알이 발에 박히는 감각이 돼 살아났다. 사정 직전 쾌락의 1/10의 강도. 그것만으로도 묘한 중독성이 생길 것 같았다. 신자마자 무릎을 들어 올려 바닥을 찍어 보았다. 변화 없음. 18... 쐐했다. 다시 그날의 어둠이 스멀스멀 원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충격이 약해서 그럴 것이다. 그때는 천장쯤 되는 높이에서 뛰어내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5일 전과 동일한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다시 방의 벽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충동적으로 오른쪽 발에도 슬리퍼를 넣었다. 방금 전 어느 발에 시험을 할지 고민했던 것이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른바 무의식이 의식을 압도하는 순간. 여전히 벽을 걸을 수 있었다. 그래도 두 번째라고 처음보다는 조금 더 쉬워진 느낌이었다.


그날의 높이만큼 올라 바닥과 수평 하게, 벽과는 수직으로 몸을 세워 침대 프레임을 잡았다. 두 무릎에 힘을 주고 팍 뛰어 바닥으로 쾅. 스르륵. 삽입이 풀렸다. 사정 직후 평온함과 우울함의 1/10의 강도. 다시 만난 세계는 왠지 모르게 짜릿했다. 해제 방법을 알아냈으니까. 추정이 가능으로 변했으니까. 컨트롤이 가능해졌으니까. '뭘까? 이 지배할 수 있음이 주는 우월감은...'




3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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