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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05. 2021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5

흐르는 여인


본문은 <삽입 된 슬리퍼 4 - 나라 잃은 백성처럼>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zzyoun/89


  이후 이곳은 내 전용 배설 장소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음주에 동참하는 멤버는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음주 강도는 증가했다. 나의 오장육부는 확연히 느껴질 정도로 노화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온갖 영양제에 손을 대기 시작해 그것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 원인 또한 술이 가장 명백할 것이다. '과량의 음주로 몸이 망가져서?'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앞으로도 술을 꾸준히 복용하기 위해서'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겠다. 오바이트 신호가 올 때면 언제나 그곳을 찾았다. 소지품이 분실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역시나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폭음은 내가 삼각지대의 낮과 밤을 훑을 수 있는 절대적 동인이었다'


 낮 시간의 삼각지대는 셋 중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전날 비가 와서 나의 흔적이 사라졌거나, 전날 눈이 와서 나의 흔적이 덮였거나. 둘 다 아닐 경우에는 언제나 토사물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말인즉슨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비둘기떼조차 찾지 않는 성역이었고, 골목골목에 기거하고 있을 게 분명한 여러 설치류들도 피해 다니는 그런 곳이었다. 언젠가 시간과 계절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날이면 공간의 음습한 중심부에 무대 위 핀 조명이 떨어지는 것처럼 한줄기의 빛이 강림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데, 그 순간에는 마치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간에 나의 결심은 확고하다. 슬리퍼와 세상과의 첫 만남으로는 빨중탕 삼각지대가 제격이다' 


 사전 답사를 위해 삼각지대를 찾았다. 건물 뒷벽 앞. 이미지 트레이닝 시작. 나는 지금 경기 전 링을 방문해 마음을 다잡았던 <록키>의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2층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니 다섯 개의 호실이 3층 높이로 나 있었다. 방마다 자그마한 창문이 있어 갈음할 수 있었는데, 몇 년에 걸쳐 오는 익숙한 곳이지만 막상 규모를 파악해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벽 2시경이 좋겠다. 날씨도 맑으니 완벽하다. 지금껏 웬만하면 큰 소란을 피해가는 인생을 살아왔던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흥분이 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옆. 산더미처럼 물건을 쌓아 놓은 트럭 가판대에서 등산용 장갑을 팔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목 양말 다섯개에 2천 원'이 메인인 이동식 상점. 왜 발목 양말 전문점에서 그냥 장갑도 아닌 등산용 장갑을 팔고 있는 것인지 심지어는 자전거 라이딩용 마스크와 고글까지 팔고 있는 것인지 의뭉스러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오늘따라 지독한 운이 따라주는구나' 근처 아웃렛이라도 가야 하나 싶었던 용품들이 손쉽게 수중에 들어오자 자연스레 조금 더 나의 꽁기꽁기한 감정에 대해 정리해 보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스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뭘까 이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만약 목표가 여성전용 고시텔이 아니었어도 내 감정은 동일했을까?'


 괜스레 산뜻해지는 고민 끝에 집으로 돌아왔고 새벽의 거사를 위해 낮잠을 청했다. 알람은 오후 10시경에 맞춰 놓았지만 이미 오후 8시부터 눈이 떠졌다. 장롱에 있는 배낭을 꺼내 오후에 구매한 장비들을 챙겼는데 물론 가장 아래에는 슬리퍼를 깔아 두었다. 한 여름이니 새벽에도 복장은 반팔 반바지가 적당할 것이다. 최대한 움직임이 용이하고 더러워져도 무방한 옷을 골랐다. 드디어 자정. 다시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물건들을 꺼내 가장 밑에 있는 슬리퍼까지 빼냈다. 괜스레 두려움이 일어 마지막 삽입 테스트를 해보았고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내 방 벽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몸을 달구었다. 새벽 1시 반 출발. 새벽 1시 45분 도착. 이 시간에 이렇게 말짱한 정신으로 이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예상대로였다. 산등성이의 가로등 불빛으로 인해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내 모습을 은폐하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건물의 벽면은 가까이서 봐도 분홍빛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흑 빛이 가득해 거기 붙어 있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나조차도 벽면에 붙었을 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인데, 휴대폰 불빛에 의지하자니 저 산에서 누군가 본다면 닭이 머리만 숨기는 꼴일 것 같아 조심조심 그냥 걸어보기로 했다.


'드디어 집이 아닌 다른 곳의 벽면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변수는 없었다. 건물 벽에서도 접착력은 왕성했다. 아무래도 야외이기에 공기의 저항이 다소 심하기도 했고 긴장상태라 몸이 조금 경직되긴 했으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 순간이 되자 사방 분간도 가능해졌다. 2층은 문제도 아니었고 옥상까지도 금방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조심조심 근 거리만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불현듯 3층 가운데 방의 불이 들어왔다. 그 주변 벽면이 눈에 선해졌고 나는 나방이 불에 홀리 듯 그 빛을 향해 진군했다.


 조심스레 빼꼼히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고등학교 3학년 혹은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속옷 하의만 입은 체 머리를 말리던 그녀를 숨 죽이고 관찰했다. 단박에 눈을 사로잡은 형상은 그녀의 등 오른쪽 날갯죽지 부근에 있는 영어 필기체로 된 문신이었다. 나는 곧장 그것이 'cinema'라는 글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제발 이쪽으로 한 번만 돌아봐라'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고 젖가슴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헐벗은 상체 위에 속옷 없이 후줄근한 반팔 상의를 입었고 그제서야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소개팅으로 만난다면 당연히 애프터를 신청할 용이가 있는 매력 있는 얼굴. 찢어진 눈매 적당한 크기의 오뚝한 코 무엇보다 새하얀 피부. 슬리퍼와 처음 대면했던 영상 속 지압용 슬리퍼를 신고 줄넘기를 하던 그 여자 아이돌을 닮은 듯도 했다. 무엇보다 영화라는 단어를 몸에 새길 정도라니 영화광인 나로서는 호감이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직 촉촉한 머릿결 때문일까 혹은 그녀의 육체 곳곳에 남아있는 액체의 기운 때문일까.


'그녀는 흐르고 있었다'

 



6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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