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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13. 2021

[단편소설] 삽입 된 슬리퍼 7

타르코프스키

 


본문은 <삽입 된 슬리퍼 6 - 이창(Rear window)>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zzyoun/93


  깜빡 다시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또 하루가 지나 새벽녘. 물성을 지닌 극심한 허기가 온몸을 짓눌렀다. 씹을 것이라곤 견과류뿐 포만감이 들만한 음식은 없었다. 배달도 불가한 시간이다. 조금만 걸어나가면 편의점이 있지만 지금은 배가 곯을지언정 걷고 싶진 않다. 몸이 말하고 있었다. 지난밤 기립에 온 힘을 쏟았으니 당분간은 앉거나 누워있는데 치중하라고. 


 '참자. 4시간 후면 배달이 가능하다'


 어제의 여운을 연장시키기 위해 <이창>을 다운 받았다. 영화 내내 제임스 스튜어트가 눈에 들어왔다. 남은 시간을 유튜브 예능 모음집으로 꾸역꾸역 채워 마침내 배달 가능 시간에 도착했다. 날개라도 돋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치킨 한 마리를 우적우적 밀 어넣었다. 허기가 가시자 몸의 감각이 선명해졌다. 허벅지 안쪽부터 사타구니까지 평소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이 뻑뻑해져 있음을 느꼈다. 아무리 훈련을 했어도 실전은 역시 다르다.


 다시금 등반의 의욕이 솟구친 것은 첫 번째 거사 후 일주일쯤 되었을 무렵이다. 몸 좀 풀 겸 슬슬 다시 내방 벽을 걸어보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중력에 저항하는 것이 나에겐 순방향이 되었다. 등반 이전과 이후로 나의 신체는 또 한 번의 각성이 일어났다. 몸이 가벼워지자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심적으로 가장 그리운 것은 'Cinema' 문신이었지만 육적으로 원하는 것은 샤워를 하기 위해 들어가는 그녀의 앞태를 직면하는 일이었다.


 '시간 때를 앞당겨야겠다'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샤워를 하고 나왔으니 넉넉잡고 1시 반부터 기다리면 될 것이다. 물론 그녀의 삶이 매일 똑같이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관성을 믿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높이기 위해 같은 요일을 선정했고 예정대로 지난주 보다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날은 동일하게 맑았다. 확실히 한 시간 차이임에도 거리의 인구 분포는 지난주에 비해 조금 밀도가 높았다. 절반 이상은 취기가 가득한 이들이었지만 지금보다도 더 빨리 나오게 된다면 목격자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삼각지대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고 별일이 생기진 않겠지만 꼭 무슨 일은 만에 하나에서 생기지 않던가. 은근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얼른 그곳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난주처럼 모든 창문은 컴컴했다. 빠르게 장비를 장착하고 슬리퍼를 삽입한 뒤 벽에 다리를 올렸다. 걸음걸이는 더욱 과감해졌고 순식간에 그녀의 창문에 도착했다. 여전히 외측 창은 열려있어 방충망으로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안쪽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 조심스레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긴 오는 것일까. 혹시 오늘은 좀 더 늦는 것은 아닐까. 늦는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고향에 내려간 것은 아닐까' 등등 잡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루함이 막 버겁기 시작할 때쯤 달그락거리며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딱-' 불이 켜지는 소리. 점멸 없이 바로 빛을 내는 LED 등. 그 순간 그녀의 눈은 나의 눈으로 향했다. 영겁의 시간 같은 찰나의 아이 컨택트. 우리는 완전히 얼어붙은 체 서로를 쳐다봤고 나는 뒤늦게 허겁지겁 몸을 숨겼다.


 '방심했다. 나에게 그녀는 오로지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 


 이대로 바닥으로 뛰어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녀가 뛰쳐 내려와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경찰이나 경비원을 대동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안경이 어둠에 취약해 벗어버린 것이 패착이었다. '단 한 번의 성공에 고무되어 너무 과감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에 집중했다. 꼭 내가 불리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나에겐 옥상이 있다. 상(上) 방향은 일반인의 상식이 닿지 않는 곳이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아노미에 빠지려는 찰나 '솨-' 방 안쪽에서 샤워기 뿜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유도작전인가?' 문득 그녀가 나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사실 보통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자연현상을 의심할 것이다. 집에 혼자 있는데 저 멀리 안방 문이 꽝 닫히는 경우처럼 말이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창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방안을 살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불투명한 화장실 창 안에 샤워기를 들어 몸에 물을 흩뿌리는 살색 실루엣만 보였다.


 나는 그 불투명한 형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윤곽만으로도 누군가를 매료시킬 수 있구나' 물소리가 잦아들었고 그녀는 나올 준비를 했다. 혹시 하는 마음에 나는 다시 몸을 숨겼다. 더 과감해지기엔 이미 그녀와의 눈 맞춤으로 간의 허용량이 줄었다. 부스럭부스럭. '탁' 불이 꺼졌다. 다시 살짝 창문 안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지난주 그 자세로 또 다른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화면 주변에서 발광하는 빛은 쩍 벌린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드러나게 했다. 불현듯 화면 전체가 눈부실 정도로 강렬한 하얀 빛으로 가득 찾다. '도대체 무슨 영화지?'


  그 순간 속옷만 입은 그녀의 외연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의 브래지어 끈이 n 부분을 살짝 가린 'Cinema'라는 글씨를.




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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