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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Dec 20. 2018

#15. 가을방학

- 서른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

2018.10.28(일) / 교대 입학 245일째.


우리학교에는 4월과 10월에 봄방학과 가을방학(정확한 명칭은 '가정학습주간')이 있다. 지난 봄방학에는 결혼을 앞두고 엄마, 외할머니와 셋이서 대만에 갔었다. (☞ 글 보기


이번 가을방학은 해외여행을 가지 않고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 이미 9월을 신혼여행으로 유럽에서 보냈기 때문에.


조용하고 평화로운 평일 오후.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느지막히 일어났다. 모처럼 집 대청소를 하고 산뜻해진 식탁에 앉아 밀린 책들을 잔뜩 펼쳐놓았다. (당연하게도 이 책들을 다 읽지는 못했다.)


나는 여행을 가도 책을 꼭 싸들고 가서, 어딘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도 테이블과 책과 노트북과 음악과 커피가 있다면 휴가를 온 것처럼 행복해진다. 네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유튜브에 '스타벅스 매장음악'을 검색해서, 소리가 기분좋게 둥둥 울리는 하만카돈 스피커로 틀어놓으면 완벽한 나만의 휴가가 된다.


바깥 세상이 모두 분주한 평일에 혼자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나를 둘러싼 작은 버블에만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평화로운 기분이 든다.





가을방학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대신, 같은반 동기들과 순천으로 1박2일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서른살의 교대생과 스물일곱살의 교대생과 스물두살의 교대생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대 언니오빠들이 많은 교대에서, 삼수까지 한 스물두살은 장수생이 아니라 거의 현역 그룹(?)으로 취급된다. 이번에 여행을 함께한 스물두살의 동기도, 한두살 어린 동생들과 주로 어울려다니는 친구였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 친구가 굉장히 어른스럽고, 리더십있고, 일처리도 똑똑하고, 또래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언니 같았었다. 그런데 언니들과 함께 여행을 오니 세상에 이런 귀여운 아가가 또 없다.


하루종일 순천의 관광지를 쏘다니다가 늦은 점심으로 순천의 명물 꼬막정식을 먹으러 갔다. 꼬막 비빔밥이며 꼬막무침 같은 것들이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지고 있는데 그제서야 아가가 슬며시 이야기한다.


"나 사실.. 태어나서 꼬막을 처음먹어봐...."


꼬막정식엔 어울리는 막걸리를 시키고 있던 언니들은 깜짝 놀랐다. 진작 얘기했으면 꼬막정식 말고 다른 메뉴를 택했을텐데.


"이번 기회에 한 번 먹어보려고."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언니들이 기분내는데 폐를 끼치기 싫었던 마음 아닐까. 신기한 표정으로 꼬막을 몇 점 입에 넣던 아가는 결국 밑반찬으로 나온 닭꼬치를 제일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먹은 꼬막정식과 막걸리


꼬막정식을 먹으러가선 닭꼬치를 맛있게 먹고, 편의점에서 술을 사자고 하면 이슬톡톡을 고르고, 인터넷에서 봤던 최신 유행어를 일상언어로 구사하는 귀여운 동기들. 이런 아이들과 매일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나도 같이 어려지는 기분이다. 


가령 10살 어린 아이들의 낯선 신조어를 접하면, 처음엔 "저게 뭐지?" 싶고, 그 다음엔 "귀엽다!" 하게 되고, 그다음엔 나도 모르게 그 단어가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반대로, 짝꿍은 회사에서 위로 15살 이상 차이나는 선배들과 일을 하고, 비싼 회나 소고기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형, 아우'하는 생활을 한다. 


내 동기들은 BTS나 엑소의 팬인데, 짝꿍은 회사 '형'들과 노래방에 가서 김성재, 이현도, 듀스의 노래를 부른다. 야심차게 샤이니의 링딩동을 최신곡처럼(?) 부르고, 귀엽다며 박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 1살 많은 남편과 세대차이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석양이 지는 순천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꼽을만 했다. 시시각각 다른 색을 품은 하늘. 넓게 펼쳐진 갈대밭.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냄새다. 푸근하고 쿰쿰한 흙냄새, 풀냄새가 그 넓은 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는 갈대밭과 석양을 배경으로 혼자서, 둘이서, 셋이서, 돌아가며 사진을 잔뜩 찍고 돌아왔다.


대학생 아내를 여행보내주고 홀로 도시에 남아 야근에 시달리고 있는 짝꿍 생각이 났다. 숨을 최대한 크게 들이쉬면 그곳의 그 석양 냄새, 갈대 냄새, 가을바람 냄새가 고스란히 내 안에 저장될 것 같았다. 짝꿍에게 그 냄새를 고스란히 배달해주고 싶었다.


(좌 : 여행을 허락해준 '형부'를 위해 동생들이 찍어준 사진) (우: 사진에 다 담을수 없는 순천만 석양)





가을방학이 지나고 나니 어느덧 2학기도 중반부를 넘어선다. 이렇게 한 해가 되고, 2학년이 되고 나면 실습을 나가야 해서 봄방학과 가을방학을 1학년만큼 온전하게 즐길 수는 없다고 한다. 이제 내게는 6과 2분의1의 학기, 3번의 여름방학, 4번의 겨울방학이 남아 있다.


내게 주어진 꽃같은 날들을 매일매일 가득 채우고 싶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 


나는 마음이 바쁘다.  





서른 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나의 꽃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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