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
2018.11.15(목) / 교대 입학 263일째.
결혼식과 신혼여행으로 9월을 보내고 나자 신혼집 정리라는 큰 숙제가 남아있었다. 자취하던 살림을 버리지 않고 들고 왔는데도, 여전히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거대한 가전가구부터 빨래바구니나 옷걸이처럼 사소한 소품까지 거의 두달여간 끊임없이 뭔가를 사들였다.
드디어 집 정리가 마무리되고, 나는 교대 생활을 함께 하는 장수생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문제는 우리집이 학교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이 넘는 먼 곳에 있다는 것.
평일에 학교수업을 마치고 저녁 초대를 하자니 친구들의 늦은 귀가가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주말에 친구들을 부르자니, 주말도 없이 밤낮도 없이 회사일에 시달리는 남편의 휴식 시간을 침해하고 싶지 않았다.
의논 끝에 우리는 수업이 없는 목요일 낮에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수능시험 날을 골랐다. 1년 전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 수능시험을 보고 있던 우리는, 1년이 지난 지금 평일 낮에 기념파티를 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준비한 음식에 친구가 선물로 가져온 와인을 곁들여 마시기 시작했다. 새로운 안주를 내고 맥주를 한참 마셨고, 수능 1주년과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촛불을 불었다. 다시 새로운 안주, 그리고 새로운 와인.
결혼 이야기, 알바 이야기, 동기들 이야기, 과제에 대한 행복한 불평, 교수님 이야기, 그 외 온갖 쓰잘데기 없고 즐거운 이야기들로 네다섯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거리감'과 '친밀감'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거리는 가깝지만 친밀하지 않은 관계가 있고, 반대로 가깝지는 않지만 친밀감이 느껴지는 관계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대에서 만난 장수생 친구들과의 관계에는 묘한 면이 있는데, '친밀감'은 높으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대에 다시 입학한 장수생들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나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온 사람도 있지만, 회사 경험 없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수능을 다시 보기도 하고, 대학 재학중에 시험을 봐서 전적대를 자퇴하고 오기도 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가 오시는 분들도 있다.
제각기 사연이 다르고 전적대도 다르고 살아온 궤적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조심스러운 편이다. 특히 교대 입학 전의 삶에 대해서 굳이 묻지 않는다.
사실 교대에 입학하기 전에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또는 어느 회사에서 일했는지, 어떤 일을 했었는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당연하긴 하다. 그런데 나는 직장에서 신상캐묻기식 문화에 계속 당하면서(?) 어느새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서 그런지, 굳이 묻지 않는 이 문화가 새삼 감사하고 좋았다.
가령,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에 대학 다닐 때 전공이 AA여서 BB를 가끔 했었는데.."라는 말을 본인이 먼저 꺼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정도.
또는 "내 친구가 CC회사에 다녀서 DD지역에 간 적이 있는데 말이야" 라는 말에 "어, 나도 CC회사 다녔었어!"라고 반갑게 밝히는 정도. 그래서 본인이 굳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점들이 꽤 있다.
이 적당한 거리감에서 느껴지는 존중과 배려가 좋다. 물론, 친하지 않아서 생기는 거리감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좋다.
늦깍이 대학생으로서의 공감대, 예비교사로서의 연대감, 어린 동기들을 귀엽게 바라보며 짓는 엄마미소, 가아-끔 다같이 수업을 땡땡이치고 학교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철없음(?). 이런 것들을 나누는 사이여서 참 좋다.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우리는 보통 20대 후반 정도부터 '장수생'이라고 부른다. 재수, 3수 정도는 그냥 현역과 다름 없달까. 20대 후반이나 30대, 그리고 40대까지도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교대만의 특이한 문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