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iPo May 22. 2018

#09. 진정한 '가정학습' 주간을 보냈다.

- 서른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

2018.4.29(일)  / 교대 입학 63일차.


우리학교에는 '가정학습주간'이라는 제도가 있다. 4월 셋째주에 중간고사를 보고나면, 4월 넷째주 일주일간 학교 수업을 쉬는 것이다.


직장인도, 학생도 쉬지 않는 4월에 학교를 쉬니, 우리학교 학생들에게는 비수기 요금으로 싸게 여행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학교 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스무살의 첫 해외여행을 준비에 열중이었다. 여행 전에 닥쳐올 중간고사 공부를 하는 것보다,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 것이다!



당초엔 가까운 곳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오려던 나는, 생각을 바꾸어 우리 엄마와 함께 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여행을 제안하자, 우리 엄마는 '엄마의 엄마'와 함께 싶어 했다. 결국 교대에서의 첫 여행은 나와 엄마, 외할머니가 함께 떠나게 되었다.


결혼 전 엄마와 함께 가는 여행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여든이 가까워오는 외할머니도 이번 여행이 지나면 또 언제 해외에 모시고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여러모로 뜻깊은 여행인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늘 혼자 여행을 다녔었다. 그랬던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돌연 착한 딸이 되어, 엄마와 할머니까지 모시고 여행을 가게 된 것은 아니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내내 시달리다가 겨우 얻은 며칠의 연차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하고 소중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렇게나 발길 닿는대로 구경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여행을 위해 뭔가를 알아보고 계획하고 예약하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를 모시고 가기는 커녕, 친구와 함께 일정을 맞추는 것도 피곤해서 정말로 혼자서만 다녔다.


지금 엄마와 할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갈 수 있는 것은, 내가 갑자기 착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일상 속에서 이미 충분히 쉬고 있고, 충분히 즐거운 일상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가정학습주간이 내게는, 없으면 죽을 것 같은 휴식이 아닌 것이다.


지금 내게는 여행을 미리 계획할 시간과 에너지가 충분하다. 대학을 다니는 몇 년 동안만 허락된 여유겠지만, 이 여유에 새삼스레 감사한 마음이 든다.




4박 5일의 대만 여행동안 나는 통역, 여행가이드, 사진사 등등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야 했다. 혼자 여행을 다닐 때보다 신경써야 할 것은 많지만 소소한 재미도 훨씬 많다.


"두 분 여기 서세요! 엄마 이쪽 봐야지! 할머니 손 더 올리세요!"


얼굴이 갸름해보이는 각도, 다리가 길어보이는 포즈를 엄마와 할머니에게 한 땀 한 땀 가르쳐드리는 재미.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매일매일 사진을 보내고 자랑하는 재미. 이것저것 음식을 사다가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을 더해 숙소에서 작은 만찬을 즐기는 재미. 그리고 4박 5일 내내 붙어다니며 하루종일 종알종알 수다를 떠는 재미.


내겐 늘 젊고 씩씩한 할머니였는데 이번 여행에선 유독 피곤해하셔서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를 모시고 가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효도라는 것이 별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아직 즐기실 수 있을 때에 재미있게 시간을 함께 보내드리고 좋은 추억을 쌓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어른들은 우리가 효도할 준비가 다 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시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다음에 효도해야지' 같은 건 안 된다. 그냥,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해 드려야 한다.


나는 엄마의 여권에 도장 하나를 더 찍어드려서 좋았고, 6개월은 써먹을 만큼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드려서 좋았다. 유창하지는 않지만 여행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의 중국어를 듣고 말할 수 있어서, 엄마와 할머니를 여기저기 자유롭게 모시고 다닌 것도 좋았다.


똑똑한 우리엄마가 60년대가 아니라 나처럼 80년대에 태어났더라면, 나보다 영어도, 중국어도 더 잘했을텐데. 엄마는 너무 일찍 태어나서 외국어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패키지가 아니면 해외여행을 가시지도 못한다. 그런 우리 엄마 대신, 엄마의 엄마를 대신 모시고 여행을 다녀올 수 있어서 좋았다.


진정한 "가정 학습" 주간에 걸맞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타이중 무지개마을에서, 내가 시킨대로 귀여운 꽃받침 포즈를 하고있는 엄마와 할머니.





서른 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나의 꽃같은 날들>


☞ 연재 안내


☞ 이전 편 보기

☞ 다음 편 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08. 10년 만에 베토벤을 다시 만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