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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Jun 15. 2018

#10. Second Chance

-서른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2018.5.23(수) / 교대 입학 87일차.


중간고사가 지나고 가정학습주간이 지나니 벌써 한 학기의 절반을 넘어섰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반 동기들과 함께 우르르 수업을 들으러 가고, 밀려드는 과제를 그때 그때 닥치는대로 하나하나 해치우고, 때때로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평화롭고 일상적인 분주함으로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휘적휘적 나를 앞서 가고 있다.




1학년 1학기에는 전공 수업이 없다보니, 대부분 교양과목 강의들을 듣고 있다. 실과 수업 시간에 우리는 학교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작은 화분으로 만든 텃밭에 감자와 토마토와 상추를 심었다. 조별로 당번을 정해 물을 주며 키우고 수확까지 해보는 것이다.


체육실기 시간에는 앞구르기, 뒷구르기, 스트레칭, 새천년체조 같은 것들을 시험으로 보고, 그에 따라 학점을 받게 된다. 무용 수업에서는 전통음악에 맞추어 소고춤을 추고, 다른 나라의 포크댄스를 배우기도 한다.


세상에 지칠 대로 지친 내게는, 이러한 것들조차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된다. 허름한 체육복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을 동기들과 함께 연습하다 보면 10년의 나이차를 잊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수업 과제로 '무순 키우기 관찰 보고서'를 작성했다. 교수님이 나누어 주신 무순 씨앗을 집에 가지고 가서 잘 기르고, 수확해서 음식으로 먹어보는 것이었다.


무순은 성장 속도가 빨라서 1주일 정도면 다 자라고, 하루하루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에 관찰보고서 작성을 위해 나는 매일 무순의 사진을 찍고 무순을 관찰해야 했다.


딱 초등학교 때 하던 '관찰보고서' 의 형식이라, 처음에는 좀 유치하고 성가신 과제라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매일 매일 정성들여 물을 주고 관찰을 하다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이 텃밭에 작물을 길러 먹으며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이 나온다. 무순을 기르는 것은 그에 비할 수 없이 쉽고 간단한 농사(?)였지만, 나는 혜원의 기분을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비록 무순에 불과할지라도, 내가 직접 뭔가를 키워서 먹어보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씨앗 불리기부터 수확까지, 알차게 키워 알차게 잡아먹은 나의 무순.



나는 무순을 좋아해서, 참치회를 먹으러 가면 늘 “무순 추가!”를 외쳤다. 그러면서 한 번도 내가 먹던 그 무순이 "무의 새싹"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것 같다.


무순 씨앗을 물에 불려 싹을 틔우고, 아주 여린 싹이 얕은 탈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곧게 뻗어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그 모든 무순은 내 식탁 앞에 놓였던 것이다.


내가 와구와구 먹어치우던 초록의 무순이 어느 공장에서 갑자기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그 당연한 진실을 나는 어린아이처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여러가지 귀여운 과제들을 하다보면, 내가 시간을 10년 만큼 되돌려 대학에 다시 온 것인지, 아니면 20년 만큼을 되돌려 초등학교에 다시 온 것인지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그래도 이런 귀여운 과제들이 무료한 일상에 소소한 기쁨이 되고 있다. 의외로 느끼는 점이 많기도 하고.



얼마 전 조별 과제를 하나 했었다. 수업과 관련된 여러가지 주제를 교수님이 정해주셨고, 제비뽑기를 해서 각 조별로 주제를 담당했다.


우리조의 주제는 '유아 교사의 처우'였다. 나는 10년 전,  정확히 같은 주제로 전공과목 조별과제를 했던 기억이 났다. 교내의 카페 비슷한 곳에 둘러앉아 검색을 하다가, 유아 교사의 처우가 너무너무 열악한 것을 보고 동기들과 술렁술렁하며 충격을 받았던 그 장면이 영화처럼 생생하다.


물론 세부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자료조사는 전부 다시 해야 했다. 하지만 과제를 하는 내내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두 번째 대학생활, 비슷한 수업, 비슷한 과제.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 대학생활에 아쉬움이 많았는데, 마치 영화 <어바웃타임>처럼, 드라마 <고백부부>처럼 내게도 마법같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10년 전 조금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 조금 더 편했을까, 뒤늦은 후회가 아주 잠깐 스쳐갔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학점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혼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나라는 인간이 이렇게 간사하고 어리석다 :)





서른 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나의 꽃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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