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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Jul 26. 2018

#11. '선의를 가진' 꼰대

-서른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2018.6.29(금) / 교대 입학 124일차.


우리 학교는 한 학번에 600명 남짓한 작은 학교이다. 보통의 종합대라면 단과대 하나 정도의 작은 규모.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풋풋한 설렘에 가득찬 이십대 초반 동기들 사이에서 서른살의 아웃라이어는, 관찰자 시점으로 가만히 앉아 아이들의 오고가는 설렘을 지켜본다.


CC(Campus Couple)는 달콤하다. 자주 보니 정이 들고, 또 정이 드니 더 자주 보고싶어지는 법이니까. 시시각각 서로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는 연인들에게, 같은 생활반경 내에서 모든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그러나 연인은 언젠가 헤어진다. 특히 이십대 초반의 연애라면 결혼에 골인할 확률보다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 이것은 CC가 아니라 다른 어디에서 만난 커플이라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별 이후에 CC의 장점은 단점이 되어 그대로 돌아온다.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에도 타의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계속 생활하는 것은 여러 모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흔히들 'CC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기도 한다.




학교 내에서 연애를 시작한 동기들의 귀여운 소식을 듣고 내 머릿속에 가장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오래 가야 할텐데! 애매하게 헤어지면 둘 다 불편할텐데!'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 아이들의 연애스타일이라던가, 성격이라던가, 연인으로서의 궁합 같은 걸 알고 한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그냥 CC라는 단어에 자동으로 튀어나온 나의 즉각적 반응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사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남자친구와 나는 회사에서 만난 사내커플, CC(Company Couple)였다는 것.


세상에, 대학은 휴학이라도 하지. 밥줄이 걸린 회사에서 바로 뒷자리에 앉은 동료와 속닥속닥 연애를 해놓고선 누가 누구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인간이 이렇게나 모순적이다.





오래 전이라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었고, 내가 근무할 부서에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던 날이었다.


한 선배가 내게 대뜸 물었다. "남자친구 있어?"


당시 내게는 입사 몇 개월 전부터 만나던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어지는 질문들.


"뭐하는 사람이야?"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회사원이에요'라고만 답했는데, 그 선배는 집요하게 어느 업종인지, 어느 회사, 어느 부서 소속인지까지 계속해서 캐물었다. 



지금 같았으면 "비밀인데요?! 왜요? 어디 훨씬 좋은 남자 소개시켜주시게요? 호호호호"하고 능구렁이 같이 넘어갔겠지만, 그 날은 부서 첫 출근일이었고 나는 군기 바짝 든 신입사원이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선배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돌아온 선배의 말. "어, 내가 그 회사 잘 아는데 말이지, 그 회사는 조직문화가 별로 안 좋고, 이렇고 저렇고 블라블라...해서 남자친구로 썩 좋지 않은데?!" 


나와도 초면인 이 사람이 대체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거지? 나는 표정이 구겨지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하하하, 그럼 선배님 말씀대로 헤어져야 할까봐요!! 역시, 그 회사는 별로죠? 선배님 말씀대로 헤어지고, 우리회사에서 찾아봐야겠네요!!!!"


나는 이를 꽉 깨물고, 일부러 더 과장해서 그 선배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척 했다. 비꼬는 것인지 진짜인지 알쏭달쏭하도록. 신입사원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선배에게서 "아니^^;;; 뭐 꼭 그러라는 건 아니고 ^^;;;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뭐^^;;; " 라는 말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당시 남자친구와는 오래지 않아 헤어졌지만, 나는 그 날의 그 당황스러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다시 CC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만약 누군가 내게 고민상담을 하며,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아무개를 짝사랑하고 있는데 다가가도 될지 물어본다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줄까? 


사내커플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뒷감당이 너무너무 힘들 것이니 시작도 하지 말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다행히 결혼까지 무사히 갔지만, 확률적으로는 그렇지 못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니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것에 대해서든 직간접적 경험이 늘어난다. 그래서 자꾸만 "내가 해봤는데..." 또는, "내 친구가 말이야..." 로 시작하는 어줍잖은 조언을 하게 되나보다. 


물론, 전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닐 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보고 겪은 데이터베이스 내에서는 '확률적으로' 더 옳고, 더 안전하고, 더 성공적인 특정 선택지를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적은 확률을 뚫고 뭔가를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스무살에 과CC로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있고, 남들이 가지 않는 험한 길을 묵묵히 개척하고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편향된 경험적 데이터를 토대로, 다른 누군가의 미래를 지레짐작해서도 안되고, 그 지레짐작을 바탕으로 뭔가를 조언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 사람이 조언을 청한 적이 없다면 더더욱.


그게 바로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회사를 다니며 '선의를 가진 꼰대'들을 너무 많이 만났고 그들의 행동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런데 늘 경계하고 조심하고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어느새 나도 꼰대가 되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꼰대질을 '언니의 조언'이랍시고 포장하며 이리저리 훈수를 두는 볼썽사나운 꼰대 말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과 생활하니 이런 면에서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겉잡을 수 없는 꼰대가 되기 전에(?) 스스로 경각심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서른 살의 교대 새내기 라이프, <나의 꽃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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