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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Sep 14. 2019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세기말 (1998~1999)

'청년공동체' 세력의 등장

*이 글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1997년부터 2019년까지의 학생운동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1997년, 두 건의 고문치사 사건 직후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 주요 간부들은 줄줄이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단언컨대, 몇몇 활동가들의 공백보다 더 뼈아팠던 것은 시민들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데에 있었다. 남총련과 전남대 총학생회는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념적 선명성의 빛이 밝아질수록 반작용의 에너지도 커져갔다. 이보다 조금 전인 1997년 3월 남총련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100여 명 중 30여 명이 총궐기 투쟁 노선에 반대표를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의원은 단체 구성원들을 대변하는 사람들로서 특정 안건 혹은 노선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할 권리를 가지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남총련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반대표를 던진 간부들을 해임시키는 중징계를 감행했다.


 해임된 이들은 남총련을 집단적으로 탈퇴한 후 '학생운동 강화 혁신을 위한 전남대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97년 7월 단체명을 '청년공동체'로 변경하고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향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들은 남총련 간부들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수모를 당했다. 역적, 안기부의 끄나풀이라는 소리를 듣고 술세례, 돌세례를 당했다. 하긴 1992년 백기완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감히 김대중 선생님 말고 다른 후보를 지지해?"라며 전남대학교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백기완 선본원들을 집단 폭행한 일이 '남총련 3대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데, 조직을 이탈한 '배신자'들에게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수모는 역설적이게도 '청년공동체'에게 더 큰 자기 동력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학생회와 정치활동의 분리', '비폭력 평화선언', '전남대 오월대 해체' 등의 안을 마련하여 전남대 재학생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97년 11월에 열린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 이전까지의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사실상 NL계열이 완전히 주도해왔고 경선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고한 청년을 고문 끝에 살해한 남총련의 어리석음에 비토를 토하는 재학생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청년공동체는 노영권 후보를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시켰고, 그는 434표라는 큰 차이로 NL 측이 내세운 오태욱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는 NL비주류를 자처했지만, '복지와 취업', '축제와 문화예술' 등을 주장한 전형적인 비권후보였다. 그는 5·18 광장 집회를 5월 18일 당일에만 열고 '한총련 탈퇴' 여부를 학우들의 의사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1998년 5월 13일, 예정되었던 대로 한총련 탈퇴를 두고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찬반투표가 실시되었다. 전남대학교 재학생 17,422명 중 7,691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중 86%에 달하는 6,565명이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틀에 걸친 투표 이후 NL계열의 총여학생회와 일부 단과대가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했기에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총학생회는 고심 끝에 "일부 학생들의 투표 저지 행위와 총학생회의 홍보 부족 등으로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해 탈퇴 여부에 대한 공식 결정을 유보한다"라고 밝혔다. 당시 전남대학교의 NL 세력은 투표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노영권 총학생회장은 한총련 탈퇴를 유보하며 "한총련 대의원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한총련의 사업과 투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1998년 11월에 열린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도 청년공동체 후보가 출마했다.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곽대중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0년간 NL운동에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투경찰로 군 복무를 하고 있던 96년 8월 연대사태에 투입되었습니다. 학생들이 휘두르는 각목과 쇠파이프에 전투경찰들이 맞는 것을 보면서 연대사태는 분명한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총련은 '영웅적 투쟁'으로 평가하더군요.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하면 그건 학생운동의 자세가 아닙니다" 곽대중은 한총련 주류와 같은 이념적 세계관을 공유하던 활동가였기에 그들의 실태를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상반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96년 연대사태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99년 민중 대격돌'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NL 세력의 몰락을 한 문장에 담아내는 표현이다.


 1998년 11월, 1999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선출하는 선거에 출마한 곽대중 후보는 NL주류 임영진-민기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지난 10년간 NL주류가 총학생회를 완전히 장악해온 것에 대한 완벽한 반발이었다. 1999년 2월 25일, 남총련 세력과 곽대중 총학생회장은 전면으로 충돌한다. 남총련이 5·18 광장에 진출하여 집회를 열고자 하자, 곽대중이 허가되지 않은 집회라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이들을 막아섰다. 결국 시위는 육탄으로 저지되었고 남총련은 '반민중적인 김대중 정권 1년 결산과 남총련 김대중 퇴진 선포식'의 장소를 바꿨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기성 총학생회 세력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바탕으로 감행된 것으로, 허가되지 않았다고 해서 집회를 막아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21세기를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사태들은 결국 그동안 활동해왔던 자들의 어리석음과 부도덕성에 대한 반감이 뼈아픈 방식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90년대 후반, 전남대 총학생회 비권 세력의 집권에는 '연대사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의 전향' 등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80년 오월의 아픔에서 비롯되어 잘못된 세상을 변혁하겠다고 다짐했던 이들 중 일부는 강철서신을 통해 북한의 '주체사상'을 새로운 세상의 설계도로 받아들였다. 들은 한국사회를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로 바라보던 NL세력을 주도했다. NL세력은 한국사회의 운동세력을 주도했고 학생운동에 있어서는 전국적으로는 한총련을, 광주에서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이념에 경도된 이들이 저지른 광기 어린 행동들은 세기말의 파고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노영권, 곽대중과 같은 사람들은 대중운동의 경험을 통해 성장한 이들이었기에 빠르게 운동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실질적인 권한을 획득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철옹성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2년간 함락시킨 '청년공동체'는 결국 남총련 세력의 맹목성과 폭력성이 만들어낸 반감의 집합체였다.


 '청년공동체'는 '북한 인권'등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맹목적으로 북한의 노선을 따라가는 행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으나, 이들 세력 일부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에 참여하는 등, 실제 북한 인권 운동을 진행했다. 청년공동체는 "학우들과 함께 새로운 학생운동을 모색하는 운동권 총학생회가 되겠다"라고 선언했지만 결국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했고, 2년간의 총학생회 운영을 마치고 총학생회실을 떠났다.


 1999년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곽대중은 현재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명과 필명으로 여러 권의 책을 내는 등,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당시 'K에게'라는 공개편지를 통해 NL 세력을 다시 한번 비판했다.

 2012년 총선 당시 광주 서구갑 지역구에 출마한 오병윤 후보를 지지하는 전현직 총학생회장단 명단이다. 1998년과 1999년 당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았던 이들이 총학생회장이었던 것처럼 올라가 있다. NL 세력에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세기말은 '잃어버린 2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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