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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Sep 16. 2019

한총련,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2000~2003) 上

다시 전면에 나선 '남총련 세력'

 1998년~1999년,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에 대한 최악의 여론을 등에 엎고 '청년공동체'의 노영권, 곽대중 두 사람이 연이어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남대를 장악하고 있던 남총련 세력이 힘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남총련은 여러 단과대학과 총동연을 장악한 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1999년 11월에 치러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회장 선거에 대거 도전장을 내민다. 결국 남총련 세력은 2년 만에 변재훈 후보를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해 총학생회 선거는 역사상 최초로 투표율 50%를 달성하지 못했고 연장투표가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연장투표 끝에 대부분의 단과대학 및 총학생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남총련의 저력은 '돈'과 '세력'에서 나온다. 역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의 절대다수는 남총련 계열 단독 후보 출마와 찬반 투표를 통해 치러졌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시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치르지 않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비민주성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이들 세력은 다수의 재학생을 구성원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세력에 합류하지 않고, 단순히 신입생으로 전남대학교에 입학해서 학교생활을 해 온 학생이 이들의 벽을 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즉 피선거권을 가진 전남대학교 재학생이지만, 일반 학생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될 수 없다.


2016년 11월 전남대 총학선거에 출마한 김설 후보의 퍼포먼스


 남총련 세력은 선거 출마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비민주적인 장치도 마련했다. 선거 공탁금을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하여 선거 출마를 어렵게 하는 방식이다. 2016년 총학선거에 출마한 김설 후보는 전남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기탁금 405만 원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광주 북구의원 선거 기탁금 200만 원, 조선대 총학생회장 선거 기탁금 150만 원 등과 비교했을 때도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이다. 게다가 선거에는 이외에도 많은 돈과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맨 땅에서 시작하는 일반 후보와 달리, 남총련 후보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력을 통해 선거운동원과 자금을 손쉽게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활동했던 선배들로부터 상당히 큰 자금을 지원받는데, 이것을 내부적으로 '보급투쟁'이라 부른다. 이러한 보급투쟁의 실체는 2016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폭로되어 선거의 쟁점이 되었다. 그해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NL계열 후보가 비밀리에 중년 졸업생들에게 후원금을 모집해 온 사실을 해당 중년 졸업생의 자녀인 전남대 재학생이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러한 남총련의 비민주성과 경직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의 총학생회장 후보 결정 과정이 폐쇄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내부 경선을 거치지 않고, 조직 윗선에 의해 결정을 하달받는다. 이 경우 구성원들은 주체적인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몰주체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더 쉽게 살아남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존 위계질서에 의해 나이가 많은 활동가가 더 요직에 배치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조직의 고령화가 진행된다. 달리 적폐(積弊)를 찾을게 아니라, 이러한 비민주성과 폐단의 오랜 축적을 적폐라고 부른다.


 1987년에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 전국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였다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은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회장들의 연합체였다. 전대협 의장은 총학생회장들의 대표였지만, 한총련 의장은 전국 대학생들의 대표를 자임했다. 이를 위해 한총련은 '한총련' - '남총련(광주전남), 서총련(서울) 등의 지역 총련' - '지역 총련 산하 각 대학 총학생회' - '단과대학 학생회' - '과학생회'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구축했다. 


 이들은 한총련 의장이 전국 대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1994년 월간 '말'지에 실린 한총련 중앙위원회 결의안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에 반발한 몇몇 총학생회장들이 퇴장하기도 했다.


 "한총련 대표자는 백만 청춘의 자주적 이해와 요구의 유일한 체현자이며 통일단결의 구심이며, 백만 청춘의 최고 의사표현이며, 학우에게는 자주적 사상의식과 창조적 활동 능력을 키워 주는 백만 청춘의 유일한 정치 지도자입니다. 대표자를 믿고 삶과 생활, 운명을 의탁하면 삶은 개척됩니다."


 2000년, 남총련은 다시 약진했다. 2000년 4월 7일, 한총련 대의원대회가 열렸고 조선대 총학생회장 이희철이 한총련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변재훈은 남총련 의장을 맡게 되었다. 다시 세력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남총련 세력의 당면과제는 '한총련 수배문제'였다. 1996년 연대사태와 1997년 이석 구타치사 사건 직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지정되었다. 한총련의 당연직 대의원인 소속 대학 총학생회장과 각 대학 단과대학 회장은 당선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었다. 이때부터 제대로 된 활동이 어려워지기에 이르렀다. 주요 활동가들이 꾸준히 연행되는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2000년 11월, 이용헌 후보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역시 남총련 후보였다. 이때의 선거 역시 투표율 50%를 달성하는데 실패하여 연장투표가 진행되었다. 2001년, 전남대 총학생회는 등 돌린 학생들의 지지를 되찾기 위해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나리가 피어나는 3월과 4월에 이러한 활동을 집중하였고 이후 매년 진행하던 활동들을 진행했기 때문에 '개나리 투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1년 4월 21일 전년도 총학생회장이었던 변재훈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7일과 8일에는 1998년도 총동아리연합회장이었던 민기채와 2000년도 자연과학대 회장이었던 정경선이 차례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2001년 11월, 김형주-윤석 후보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및 부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002년, 김형주는 제10기 한총련 의장으로 당선된다. 이후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의 한총련 의장 7명 중 4명이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전남대 출신들의 한총련 의장직 장악은 이들의 실력이나 조직력보다는, 완전히 실패한 한총련 운동의 고립을 보여준다. 2002년부터 한총련 내외부에서 혁신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下에서 계속).


<참고 1997년 이래 역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199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강위원 (한총련 의장)

1998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노영권 (청년공동체)

1999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곽대중 (청년공동체)

2000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변재훈 (한총련)

2001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이용헌 (한총련)

2002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김형주 (한총련 의장)

2003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윤영일 (한총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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