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 28일,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이 4년 2개월 만에 출소하였다. 그는 출감 직후부터 한총련 합법화 범시민대책위원회 구성 작업을 시작했다. 한총련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회장에 당선되는 것만으로 수배자 명단에 오르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02년 5월 28일, 한총련 10기 의장 김형주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그는 한총련 의장 및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임기의 절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셈이다. 한총련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
"미제와 반통일세력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10기 한총련 의장 김형주 의장님이 미제와 반통일세력들에 의해서 연행되었습니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공안당국이 반미반전반핵, 반통일세력 척결의 선봉장 한총련에게 야수와 같은 탄압을 자행하고 급기야 오늘 백만학도의 단결과 투쟁의 구심 김형주 의장님을 연행해 가는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행각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한총련 백만학도는 김형주 의장님을 구출하고 한총련에게 들씌워진 이적단체 규정 철회에 적극 나설 것이며 모든 탄압의 주범인 미제와 반통일세력들에게 천배 만 배의 타격을 가할 것을 선포합니다!"
의장의 검거 직후 발표된 한총련의 성명서에는 제대로 된 비판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설명보다는,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과 교조적인 믿음을 전시하는 한심한 수준의 성명문이었다. 이 시점의 한총련은 이미 제대로 된 판단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2002년 11월 2일, 2003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윤영일 농대 학생회장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남총련은 고심 끝에 윤영일 후보를 그해 총학생회장 선거에 옥중출마시켰다. 그는 역시나 '단독 후보'였다. 이미 학생들의 관심을 잃은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는 NL계열 단독 후보만이 존재했다. 결국 유일한 후보마저 옥중 출마하자 학내에서는 비판이 쏟아졌다. 단과대학 6곳과 총여학생회 선거에는 후보자조차 없었다. 전대신문은 "단일후보마저 옥중출마 정책 실종 투표율마저 최악"이라는 기사에서 "총학생회 선거는 정후보 없이 부후보만이 선거 유세에 나섰으나 단일 후보로 치러지는 사유로 인해 정책 설명보다는 투표참여만을 유도했다"며 이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윤영일 후보는 찬반투표를 통해 당선되었다. 찬반투표는 투표율 50%를 넘기기만 하면 당선이 확정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학생 의사 반영이 불가능했다. 2003년 3월 13일 윤영일 총학생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그는 총학생회장의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남총련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전남대학교에서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 치러지고 있던 2002년 말 동아대학교에서 하나의 제안이 나왔다. 동아대 총학생회가 새로운 단일 학생조직 건설을 제안하며 '대학생 문제 해결'을 내세운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추진위원회가 건설되었다. 이들은 2년 간 새로운 전국단위 대학생 조직 출범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대련은 300만 대학생을 하나로 모아내 등록금 문제 등을 비롯한 학생들의 요구를 그들 자신의 힘으로 실현하는 조직을 목표로 했다. 이 시점의 '한총련'은 이미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문재인 민정수석과 강위원 집행위원장
2003년 3월 16일, 한총련 합법화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집행위원장을 맡은 강위원이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의 면담을 진행했다. 강위원 집행위원장은 "새 정부가 한총련 합법화를 위한 정치적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으며 문재인 민정수석은 "단과대학 학생회장 이상이면 자동으로 수배 대상이 되는 건 국제적인 망신"이라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한총련 합법화 문제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일각에서 '4월 수배해제설'이 등장했다. 4월 14일 혁신파로 분류되던 정재욱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제11기 한총련 의장으로 취임했다. 5월 2일 정재욱 의장이 MBC TV토론 방청석에 깜짝 토론자로 나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한총련의 상황을 설명하고 합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는 불과 2주 만에 180도로 뒤집히게 된다.
2003년 5월 18일,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첫 5·18 민중항쟁 기념식이 엄수되었다. 이날은 5·18 민중항쟁 23주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남총련을 필두로 한 한총련 소속 활동가 1천여 명이 5·18 묘역 정문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며칠 전에 있었던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규탄과 함께 한총련 합법화 및 수배해제를 요구하며 기습시위를 감행했다. 한총련의 기습시위로 인해 기념식은 20분가량 지연되었으며 대통령은 묘역 후문을 통해 기념식장에 입장한 후 후문으로 퇴장했다. 시민들은 이들의 행동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심지어 일부 활동가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5·18 묘역에 보낸 조화를 쓰러뜨린 뒤 발로 밟기까지 했다. 참으로 몰상식한 행동이었다. 5·18 정신에 따라 5·18 묘역에서의 시위 역시 허용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번 시위를 통해 그 무엇도 바꾸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변화에 기여하기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에 차디찬 냉소를 남기는 행동으로, 전략적으로 가히 어리석음의 극한(極限)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 직후 5·18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조비오 신부마저 "이들의 행동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가장 크게 분노한 건 전남대 재학생들이었다. 안 그래도 총학생회장 후보의 옥중출마로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그의 주도 하에 이런 일까지 일어나자 그간 쌓여온 분노가 폭발했다. 그해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NL계열 후보의 단독 출마, 찬반투표는 옛말이었다. 1997년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 직후와 같은 강렬한 반 NL 정서가 확산되었다. 그해 11월, 3팀의 선본이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용득 총학생회장 후보는 '反운동권'이라는 선본명을 내세우고 출사표를 던졌다.
이렇듯 1997년 이후 전남대 총학생회의 역사는 적폐 세력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분노가 도를 넘을 때마다 반발하는 세력이 선거에 출마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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