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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May 03. 2017

변하는 것, 변하지 않는 것

2017 도쿄 여행

지하철에 앉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무 생각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의식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옆자리 학생들의 이야기. 앳된 얼굴의 두 친구는 연인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아마 대학 동기 사이쯤 되었을 법 싶었다. 


"야 나 완전 그때 취해가지고~"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알콜이 몸속에 들어가면서 일으키는 반응이 너무도 새로워 그 반응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매개체인 알콜을 어려움 없이 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유를 모를 뿌듯함이 왠지 생겨버리던 때. 왠지 어른의 세계에 편입되었다는 기분과 미래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낙관과 희망에 차있었던 때.


청춘(靑春). 새싹이 파랗게 돋아다는 봄철을 뜻한다는데 나를 포함한, 그리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청춘들은 사실 취춘(醉春)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맥락에 맞지 않을까 싶다. 취한 봄을 통과해내던 우리들. 


내게 이 취춘이라고 하면 많은 얼굴들과 많은 부끄러운 순간들이 떠오르지만, 이번에 도쿄를 함께 다녀온 친구들이야 말로 서로의 부끄럽고 또 항상 취해있던 취춘의 시기를 누구보다도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던 때 공항으로 마중 나왔던 고마운 친구들. 정말 쿨하다고 여겼던 녀석이 공항 밖에서 주저 않아 울었다는 이야기는, 쉽게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지금도 별로 믿기지는 않는다. 기약 없는 안녕을 말했던 그 때로부터 딱 1년 만에 우리는 함께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유럽에서 나름 고군분투하던 동안 멀고도 가까운 일본에서 새롭고 또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시작을 하게 된 친구를 보기 위해서.  


DAY 2


銭湯 (Sentō) 센토

다른 친구들보다 이틀 정도 일찍 도착한 내가 혼자 있을 때 제일 가보고 싶었던 곳은 일본의 공중목욕탕 센토. (여행은 살아보는거야) 애청했던 미국 드라마 Girls에서 일본으로 잠시 이사했던 쇼샤나가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을 보고 어쩐지 나도 일본의 공중목욕탕에 가고 싶어 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공중목욕탕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1. 센토는 40년도 더 되었을 것 같은 시설에 어쩐지 훨씬 정겨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2. 남녀 탕을 구분하는 것이라곤 천장이 뚫린 칸막이 같은 벽뿐인지라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든 소리를 죄다 들을 수 있다는 것 정도. 450엔.


DAY 3



とん喜 (Tonki) 통키

6 Chome-5-15 Ginza, Chuo, Tokyo 104-0061, Japan

아침에 나리타에 떨어진 친구를 픽업해 도쿄역에서 가까운 긴자로 향했다. 긴자에서 유명한 오므라이스 집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막상 가보니 줄이 너무 길어 대안으로 찾은 돈카츠 정식집. 맛도 맛이지만 새우나 오징어, 가리비 등 각종 해산물을 이렇게 튀겨내는 정식은 또 처음 먹어봐서 신기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긴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주변에 오므라이스 같은 경양식 집이 많더랬다. 그리고 긴자에서는 나이 지긋한 바텐더들이 본격적으로 흰 장갑을 끼고 비싼 양주로 정성스럽게 칵테일을 만들어 주는데, 긴자에서 (비싼) 술을 마시고 밤늦게 택시를 타고 갈 정도의 여유가 일본 직장인들이 선망하는 부의 정도라고..



戎 (Ebisu) 에비스

Japan, 〒167-0053 Tokyo, Suginami, 西荻南3丁目11−5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봄밤에 야키토리와 생맥주의 조합이라면 설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허름하고 작은 이 가게는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정겨운 분위기가 그 매력이다. 간장 소스에 바삭하게 구워진 네기마 (닭고기와 파 꼬치)는 단연 꿈에서도 그리울 맛.


DAY 4



그 좁은 친구의 방에서 넷이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어 겨우 잠이 든 첫째 날 밤은 가고 아침이 밝았다. 집 앞에는 집주인이 심어놓았다는 유자나무에 거짓말처럼 유자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이번이 생애 첫 일본 방문이었던 친구가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사진을 남겨두었다. 아니라면 기억 저편에서 빨리 잊혔을 친구가 사는 동네의 정겨운 풍경.  



浅草神社 (Asakusa Shrine) 아사쿠사 절

언제 가도 정말 정신없다. 도쿄에서 몇 없는 좋아하지 않는 곳 중 하나인데 어찌 세 번의 도쿄 여행에서 항상 들렸던 것 같다. 첫 번째만 빼고는 다 내 의지와는 무관했지만.


ホッピー通り (Hoppy Street) 홋피 도오리

Japan, 〒111-0032 Tōkyō-to, Taitō-ku, 台東区Asakusa, 2 Chome−3−19

아사쿠사 절 주변에 홋피 도오리라고 하는 거리가 있다. 말 그대로 홋피라는 술과 거리를 의미하는 도오리가 합쳐져 만들어진 지명. 홋피는 일본 소주와 홋피라는 음료를 섞어서 만든 술이라고 한다. 이 거리에 홋피를 파는 가게들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허름한 멋의 많은 상점들이 줄을 잇는다. 날씨가 좋아 야외 테이블이 마련된 곳에서 한 잔. 



立石 (Tateishi) 타테이시

도쿄도 강남과 강북처럼 동서(히가시/니시) 쪽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한다. 동쪽으로 갈수록 허름하고 낡은 서민 정취가 듬뿍 담긴 시타마치(下町)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서쪽은 그 반대로 서울로 치면 강남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했다. 서울에서도 포장마차를 즐겨 찾고 을지로에서 골뱅이무침을 먹던 우리였으므로 번쩍번쩍한 오모테산도 같은 동네보다는 시타마치 쪽이 더 끌렸던 건 당연하다. 추천을 받아 아사쿠사역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타테이시라는 동네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은 것이 유감스러웠지만 외관상으로는 마치 근대에서 온 듯한 상점들이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재미있게 본 일본 드라마 잘 먹었습니다 (ごちそうさん)의 한 장면에 들어간 줄 알았다! 멋진 분위기.



高円寺 (Kōenji) 코엔지

뭔가 인디(?)스럽고 매니악한 분위기의 동네. 구제 옷을 파는 중고 매장들이 많아서 도쿄 여행 때마다 항상 들려 몇 점을 골라서 사곤 했는데 빈곤한 처지인 올해는 아무것도 살 수가 없어야 했으나 샀다.


Koen Shisha 

Japan, 〒166-0003 Tōkyō-to, Suginami-ku, Kōenjiminami, 3 Chome−37, 東京都杉並区 高円寺南3-37-25 1F

이번에 코엔지는 작년에 만석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 시샤 바에 가기 위해서 일부러 들렸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물담배였는데, 달달한 향이 느껴지면서 신기하고 재밌던 처음과 달리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파오고 목이 따끔해져서 오랫동안 할 수는 없었다. 흡연자인 한 친구는 흡사 아편굴과도 같은 퇴폐적 분위기에 홀딱 반해 혼자 남아 우리가 시켰던 시샤 두 통을 끝내고 돌아왔다. 


トレジャーファクトリースタイル高円寺店 (Treasure Factory style Koenji shop)

Japan, 〒166-0003 Tokyo, Suginami, Koenjiminami, 4 Chome−4−15

내가 갔던 중고샵. 이곳에서 같은 남쪽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이름이 있는 브랜드 상품을 주로 판매하는 같은 상호명의 다른 지점도 있다. 시모키타자와에도 지점이 있다. 이외에도 남쪽 출구로 나와서 이 부근을 돌다 보면 다른 중고샵들도 찾을 수 있다.


DAY 5



아침에 친구(겸 가이드 겸 엄마 겸 부끄러움의 몫을 담당하는 사람)가 학교 간 사이 한 번 더 들린 코엔지.



下北沢 (Shimo-kitazawa) 시모키타자와

코엔지가 매니악한 홍대의 느낌이라면 시모키타자와는 홍대와 대학로를 섞어놓은 분위기라고 했다. 극장들이 많아 연극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 코엔지처럼 중고샵이나 특이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도 많다. 


下北沢店 (HIROKI) 히로키

고독한 미식가에 나왔던 오코노미야끼 전문점. 처음 도쿄에 들렸을 때 왔던 곳인데 너무 맛있어서 이번에 또 가자고 졸랐다.



吉祥寺 (Kichijōji) 키치죠지

매년 살고 싶은 동네의 하나로 손꼽히는 키치죠지. 이노카시라 공원을 정말 좋아하지만 이번엔 들릴 여유가 없어 예약해놓은 니혼슈야만 찍고 돌아왔다. 

 


여행을 마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지금,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친구가 사는 동네의 이곳저곳을 자전거를 타면서 누비던 기억이 생생하다. 딱 그 시간의 해가 저문 정도, 저물어가는 늦봄의 해가 남겨둔 얼마간의 온기, 순간에 불어오던 따뜻하고도 선선한 바람 같은. 그리고 그때 느꼈던 울 수는 없을 만큼만의 슬픔. 마냥 웃어대던 우리의 사흘이 벌써 끝났다는 사실과 이 사흘의 속도만큼이나 우리의 시간은 빨리 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슬프지만 또 너무 당연해서 울면 안 될 것만 같다. 지금이야 아직 과거에 묻어두지 않은 시간이지만 곧 사진으로 기록된 순간들만이 기억의 파편으로 남겨진 때가 오겠지. 




짧고도 길었던 5박이 지나고 밤의 한가운데, 하네다 공항행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좋아하는 일본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들으면서 창 밖 넘어 풍경을 내다보는데 이다지도 쓸쓸하다. 작년 도쿄를 찾았을 때 나는 3일의 일정을 10일로 연장해버렸다. 당시 내가 맞닥뜨려야 했던, 스스로 내린 선택의 무게는 나의 공간과 사람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내 인생의 많은 가능성들을 어쩌면 앗아간다고 느꼈을 정도로 버거운 것이었다.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확실치 않았던 때, 마침 일본을 찾았고 오랫동안 내 안에 자리했던 일본에 대한 나의 애착이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도쿄의 화려하고 빛나는 공간을 찾는 대신 친구의 주변을 - 좋아하는 서점을, 오래된 킷사텐을, 그리고 애정 하는 니혼슈야를 - 맴돌았다. 내가 어쩌면 꿈을 꾸었던 자리에서 내 꿈이었을지 모를 생활을 하고 있는, 이물감 없이 자연스레 그곳의 일부가 되어버린 친구를 보니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친구에게 있어 우리를 포함한 이 곳의 사람들과 서울만큼, 이제는 마음에 지분이 커졌을 그곳의 사람들과 도쿄. 그런 친구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국을 떠나 있던 작년, 내게 고향의 얼굴보다도 자주 아른거리던 이 도시 - 도쿄에서의 생활자에 대한 미련이 어쩐지 모습을 감춘 것 같다. 그렇게 도쿄에 마음을 거두지 못한 채 떠났던 나 자신이 낯설어져 버렸다. 


반 세기가 지나도록 자리를 지키는 카페와 구두상이 있는 이곳 도쿄에서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길을 가면서 변해있고 또 변해있지 않은 우리를 발견한다. 이따금 스스로에게조차 의아할 정도로, 너무도 다른 우리 넷의 연은 얽히고설켜 6년이라는 시간의 끝에 있다. 어쩐지 어설프고 완벽지 않은 우리, 어쩌면 이 6년의 시간이란 우리 모두가 실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가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불완전한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 생각 없이 취해버리고 또 웃으면서, 돌아오지 않는 그 취춘의 시기를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친구들.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도시가 당신에게도 있는지. 세월의 흔적을 골목 곳곳에서 시작해 우리 안에서 발견하도록 거울을 슬쩍 내미는 그런 곳이. 


슬프지만 안녕! 도쿄, 그리고 취한 우리의 푸른 봄.




사진 제공: https://www.instagram.com/kyumj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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