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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유 Dec 21. 2023

4화. 명함 없이 나를 만나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재수 1년, 대학교 5년, 회사를 다닌 기간 11년, 모두 합해 29년.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타고 내리듯 내가 누르지 않아도 누군가가 누른 버튼으로 문이 열렸고, 별 다른 생각 없이 내렸다 타기를 반복했다. 일상처럼 누군가 누른 버튼에 문이 열리고 내리던 어느 날, 내려보니 아무것도 없다. 늘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소속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명함이 사라진 채 온전히 혼자만 홀로 서 있었다.



나는 누구지?



명함은 강렬하다. 명함만 있으면 아이엠그라운드 같은 자기소개가 필요 없다. 회사로고, 부서, 직함, 이름이 새겨진 명함 한 장만 있으면 하이패스처럼 통성명이 끝난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를 보기보다 명함을 보는데 시간을 더 많이 쓴다. 내가 보라색을 좋아하고 겨울에도 시원한 아이스 음료를 마시며 미키마우스와 아기공룡 둘리를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나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퇴사를 하니 자연스럽게 명함도 사라졌다. 명함이 없으니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 막막하다. 그러나 퇴사 후 새로 만나는 사람이라곤 동네 아줌마들이 다였으니 딱히 명함이 필요 없기도 하다.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나이도 경력도 필요 없다. 자녀가 몇 명이고 자녀의 나이가 몇 살인지만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내 이름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다. 명함이 있었다면 더 서운했을지 모를 상황이다.


그렇게 나의 이름 세 글자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간속을 향해 들어간다.





퇴직연금 해지를 위해 은행에 갔을 때. 담당 직원의 초롱초롱하고 부러워하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평생을 워킹맘으로 지내온 시어머니가 두 손들고 반기시는 인사도 잊혀지지 않는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만 있던 이모의 한 마디도 깊게 남아 있다.


"엄마가 퇴사해서 아이가 좋아하겠어요."

"아이고 잘했다. 이제 다른 사람 손에 안 맡겨도 되니 준후가 좋아하겠다."

"아이한테 36월까지가 중요한데 정말 잘했다."


내가 퇴사했는데 온통 아이 이야기다. 은행원의 부러움도 시어머니의 환영도 이모의 안도함도 모두 아이를 향한 메시지이다. 하루아침 소속이 없어진 나의 상실감, 공허함은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다. 모두 한 뜻으로 아이만 잘됐다고 한다. 아이를 생각해 주는 마음 또한 감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는 감사함 보다 서운함, 아이에 대한 애정보다는 질투가 생겨나던 경험 부족한 초보 엄마였다. 잘 알지 못하는 감정을 눌러 담은 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로 나의 자리를 아이에게 점점 내어 주었다.




동화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는 왕자를 구해준 이후 매일 육지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간다. 자신의 세상이 답답해 하면서 매일 다른 세상을 꿈꾸고 왕자만 생각하며 자신의 시간을 채워간다. 육지라는 세상에서 적응할 수 없는 몸이지만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의 목소리와 맞바꾼 두 다리로 육지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지만..결론을 기억하는가. 인어공주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인어공주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두 다리의 대가가 왜 목소리였을까? 목소리는 '자아'의 상징이다. 목소리가 곧 '나'인 것이다. 나의 목소리로 나의 이야기를 했을 때 세상이 나를 알아준다. 그러나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는 자신을 알릴 수도 없었고, 누구도 인어공주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았다. 이야기는 왕자가 다른 공주와 결혼하고, 인어공주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자신의 원하는 것도 얻지 못했을뿐더러 자신을 잃은 채 원래 속해 있던 세상으로도 다시 돌아가지도 못한다.


당시의 나는 인어공주와 꽤 닮아 있었다. 실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이튿날. 특별한 이유 없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려 목소리가 잠긴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별다른 통증이 없으니 하루 이틀 견뎌 보았다. 그러나 목이 꽉 막혀 목소리가 계속 나오지 않아 답답함에 병원을 찾았지만 특별한 진단을 받을 수 없었다. 찾아보니 심리적 원인으로 일시적인 후두의 압박, 성대 이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중요한 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고, 그 상태에서 분명히 자아를 상실했다.


명함이 있을 때, 명함이 나 대신 말해줄 수 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고 대신 말해줬다. 그러나 명함이 사라지고 온전히 나만 남았을 때,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스스로 자신을 말할 수 없음이 괴로워 몸은 알아서목소리를 차단해 버렸는지 모른다. 차라리 말을 못 한다는 핑계뒤에 자신을 숨기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아의 어리석음을 직시하라고 몸이 보낸 신호였는지도모른다. 외부로 나가는 소리를 잠재우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지나고보니 입사보다 준비를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이 퇴사였다. 입사는 소속이라는 상자 안에 들어가 나를 보호할 수 있지만 퇴사는 상자 밖으로 나오는 일이다. 일정한 수입이 없이도 버틸 수 있는 유용자금은 당연하고, '나'라는 무기가 없다면 함부로 상자 밖에 나오면 안 된다. 나만의 무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퇴사는 마음만 간직한 채 잠시 미루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 회사라는 든든한 뒷 배경 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지 꼭 확인했어야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무지했고, 안일했다. 그리고 명함 없이 나를 똑바로 마주할 용기도 없이 스스로를 내던져 버렸다.



회사가 자존감을 키워주지 못할지라도 자신감은 줄 수 있다. 그러나 퇴사 후 있던 자신감마저 잃어버리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자신감은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인데 그동안 명함을 보며 나를 신뢰했다면, 이제는 무엇을 보고 스스로를 신뢰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 기생충처럼 어딘가에 기생해야만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던 불안한 존재였다. 그 때라도 깨달았으면 좋았겠지만 인생은 쉽게 나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깨닫기 보단 익숙한 방식으로 기생할 수 있는 또 다른 대상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새롭게 기생 대상을 찾았다.


그것은 의외로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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