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공작소 Oct 22. 2021

층간 소음이 위로가 될때

외로움의 아름다움


오늘 아침, 기사를 하나 읽었다.

아이로 인해 층간 소음이 걱정된 아이 엄마가 아래층 어르신께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거기에 이렇게 답을 하셨다고 한다.

ㅇㅇ엄마 이름이 너무 정겹네요.
매번 감사합니다. 혼자 외롭게 사는 늙은이,
시끄러움도 위안이 된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출처 2021.10.22)




마음이 따뜻해진다.

글로 보아 위 층 아이 엄마도 감사함의 표시가 처음은 아닌가 보다. 서로의 따뜻함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나에겐 따뜻함도 느껴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끄러움도 위안'이란 말이 크게 와닿았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 때나 음악을 배경처럼 켜 두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차로 이동을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 라디오나 음악을 켜둔다고 하던데 나는 차를 운전할 때도, 집에서 일을 할 때도 음악이나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그럴 때는 음악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내서 음악을 듣지 않는 한, 음악을 들을 일이 없었다. 직장 다니느라 아이 키우느라 바빴는데 시간을 내서 음악을 듣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풉! 이 즈음 쓰고 보니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맞나 싶다.)


내 기억에 그나마 저장되어 있는 마지막 음악은 고3 때 듣던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들이다. 입시 공부하다 틈이 나면 위안을 얻던 멜로디들.

1988년이니 정말 까마득하게 옛날이다. 그래서 요즘 노래 전주를 듣고 제목을 맞추거나 가수를 맞추는 프로그램을 보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아, 사람들은 다 나 같지 않구나!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음악들을 들을 수가 있었지?' 사람마다 참 다르구나.'


그런데, 새로운 삶의 마디를 지나며 좀 달라진다.

어쩌면 그전에는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큰 의미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행동이 주변 사람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나의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 질지, 사람들을 대응할 생각,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걱정에 집중하느라 그랬으리라.

나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 커지고, 많아졌다.

나의 통제권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피곤해 지니 사람 만나는 일도 귀찮아졌다.

그럴 때 음악은 예민한 신경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소음이었으리라.


살다 보니 그런 때도 지났었는데, 중년은 '의무나 책임'에 가벼워지는 시기인 것 같다.

예전처럼 다른 사람을 그렇게 의식하지 않아도 됨을 알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경험이 축적되니 무거운 책임에 대한 중압감이 좀 가벼워진달까.


그런데 삶은 참 얄밉다.

강한 의무감과 책임감이 비워진 자리에 '외로움'이 두드리기 때문이다.

마주하기 싫어 외면하던 '외로움과 고독'이 '젊음의 힘'이 비켜나자 드러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드러나든 찾아오든 중년의 외로움이 주는 신호를 잘 읽는 것이 이 즈음 풀어야 할 '삶의 미션'은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이 시기를 '갱년기 更年期'라고 부르는 이유도 있겠다 싶다.

신체적인 것도 점점 바뀌어 가고 그로 인해 그동안 힘들게 정력을 쏟아 살아왔으니 '네 몸과 마음을, 즉 너를 돌보라'라는 새로운 시기.

'외로움'은 다른 사람과 ' 함께' 하라는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내 마음대로 풀어본다.

그동안 '젊음의 패기를 즐긴 나'로 행복하게 지냈으니 이제는 '함께 즐겁게 살아보는 나'로 다시 사는 삶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참 우습게도 사람들이 깔깔거리는 소리들이 예전과 다르게 정겹게 들린다. 아파트 1층 놀이터에서 다투기도 소리치기도 하던 팬데믹 이전의 시간들이 그립다.

푸르고 조용한 자연도 좋지만 복잡한 백화점의 바쁜 움직임에도 마음이 안정이 된다. 운전하면서 듣는 라디오에서 투닥 거리는 사람들의 생기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설거지하면서 듣는 음악이 더 이상 소음이 아니라 포옹같이 느껴진다.

이것이 중년의 마디에 얻게 되는 '즐거움'이다.


외로움은 나약하고 미숙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은 과거의 내가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젊음을 즐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마음이라고 여기고 싶다.

그러다 보니 누구와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새로운 관점의 숙제를 건네받은 듯하다.


위층의 소란스러움이 '무시'가 아니라 '고마움'으로 아름답게 전달받는 할아버지는 자신의 소망을 잘 아는 '자기에게 투명하고 솔직한 사람이 아닐까?'라고 추측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블루베리 스무디, 어묵탕 그리고 남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