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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공작소 Oct 21. 2021

블루베리 스무디, 어묵탕 그리고 남편

은혼식 즈음에나 알게 된 것


요즘, 아침 시간이 참 좋다.

6시 즈음 일어나면 하루가 길다.

그 시간에는 길을 넓히느라 시끄러운 공사장에서의 소음도 없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잠시 눈을 감고 묵상을 한다.

조용하다. 차가워진 가을이 얼굴을 때린다.

'아, 차다!'

그러고 보니 여름과는 다른 소리들이 찾는다. 거기에 나를 맡기면 잠시 자연과 접촉이 된 착각마저 든다.

'더 찬 겨울이 오면 이마저도 못 느끼겠지.'

보고 싶은 유튜브 영상 몇 편을 보고 나면 남편을 깨울 시간이 된다.


남들에게 말하면 아직도 그러냐는 놀림을 당하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남편을 깨우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

손을 비벼서 따뜻하게 만들어 자고 있는 남편의 발을 조몰락조몰락 마사지를 한다. 놀라서 깨지 않도록.

컨디션이 괜찮고 밤 잠을 잘 잔 날이면 부드럽게 몇 번만 주물러도 일어난다.

그런데 컨디션이 저조하거나 밤 잠을 설친 날에는 요구가 생긴다.

"종아리도 좀 부탁해."

그러고 보니 발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종아리 탄력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고...

나에게 한 번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이 사람은 정말 힘들지가 않은 걸까? 종아리 마사지까지 넘어가면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


나도 책임감이 강한 첫째 아이로 자라 누구에게 힘들다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편인데, 이 사람은 나보다 더한 면이 있는 듯하다.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이 사람 마음을 행동으로 들어야 한다.

엊그제 결혼한 지 25년이 된 은혼식이었는데, 이제 즈음돼서야 남편의 서투른 표현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언제 내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지,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투정을 하고 또는 고마워하는지, 행동이 이야기를 한다.


엊그제는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손톱이랑 발톱을 깎아달라고 했다. 너무 바투 자르는 거 아니냐며 핀잔을 주지만 기다렸다가 다른 쪽 발까지 맡긴다.

그 사람만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외로움의 표현 방식이다.

그럴 때면 출근할 때도 신발 끈을 묶어 달래기도, 늘어진 소맷단을 접어 달라 기도, 옷을 골라 달라기도 한다.

"요즘 마음은 어때? 잘 지내?"라고 물으면 여느 때와 같이 "그럼, 잘 지내지."라고 이야기한다.


발 마사지로 잠을 깬 남편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나는 먹을 것을 준비한다.

요즘은 스무디다.

바나나에 아보카도, 블루베리를 우유와 함께 넣고 만든다.

과일이 다이어트에 좋지 않다고는 하던데 이렇게 오랫동안 먹어도 괜찮을까 염려가 된다.

그래도 뭐, 어머님이 주신 블루베리를 다 먹을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시 부모님이 때마다 농작물들을 주시는데 양이 과 할 때가 많다.


평소에는 음료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데, 오늘 아침엔 식탁에서 시 부모님께서 주신 땅콩을 고르고 있는 내 앞 의자에 앉는다.

블루베리가 잘 갈리지 않았다며 소심하게 툴툴대다 옷매무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긴소매를 내게 들이민다.

흙 묻은 땅콩 고르느라 더러워진 손을 털고, 거슬리지 않도록 소매를 접어 준다.

거울에 비춰보고 만족스럽게 출근길을 나선다.


오늘은 엘리베이터가 1층까지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가 주방 창문 너머로 자리를 옮겨 그의 차 뒷모습이 없어질 때까지 본다.

요즘 어린아이가 되었구나.


내일 아침에는 스무디 말고 오징어 국이나 어묵국을 끓여서 준비해 놓아야겠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시작한다.



그림출처: © youjeench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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