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정기 검진이 있는 아빠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젊으셨을 땐 건강하고 멋진 아빠였는데, 점점 노쇠해지고 약해져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착찹해졌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죽음 앞에서 어떤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하는 물음' 영원하지 않음을 만나게 될 때 마다 우울이 찾아 오는 것 같다.
"자기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마음, '자기'가 크면 클 수록 죽음 앞에서 좌절감이 크게 되지."라고 내게 수퍼바이저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그리고 오늘, 이 글귀를 읽는다. 특히 '자기 한계'라는 부분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사는 이유가 무얼까, 고민하고 찾으려고 할 수록 만나게 되는 것은 작고 미미한 존재인 '나'인 것 같다.
자기 좌절 self- frustration 을 건강한 자기 규율 self disicipline과 구별해야 한다. 야무진 사람 well-organized person 은 특정한 활동 또는 특정한 만족을 기꺼이 보류한다. 다른 목표가 더 중요하고, 그 목표가 자신이 세운 가치 위계에서 윗자리를 차지 하기 때문에 보류한다.
따라서 결혼한 젊은 부부는 자가 주택 소유에 필요한 자금을 저축하려고 향락 생활을 자제할 수도 있다.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나 작품에 헌신하는 예술가는 고요한 시간과 집중이 자신에게 가치가 더 크므로 사회 생활을 제한 하려고 한다. 이러한 규율은 시간과 돈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의 인정을 전제한다. 애석하게도 신경증 환자는 바로 그런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 진정한 소망을 인식하고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덜 중요한 가치를 포기 할 줄 아는 능력도 전제한다.
신경증 환자가 그런 능력을 가지기 어려운 까닭은, 그가 품은 '소망'이 대부분 강박에 사로잡힌 필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또 여러 소망이 본질적으로 모두 똑같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단 한 가지 소망도 포기할 수가 없다.
< 신경증 극복과 인간다운 성장 _ 내가 나를 치유한다 / 카렌 호나이 저> 중 제 5장 자기 혐오와 자기비하 p 197
나는 모든 사람들이 사는 과정에서 신경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열외는 없다. 그래서 어떤 관점으로는 신경증 극복이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한계를 언뜻 알아차리게 되고, 그것을 부정하려고 생 난리 난리를 치다가 결국은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다음의 인생 단계를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신경증 자체를 문제로 보고 싶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실 신경증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모든 것이 삶의 연속성으로 바라보면, 증상은 고치고 없어버려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삶이 내게 주는 질문'을 받는 타이밍 이라고 - 어쩌면 이제서야- 확신한다.
요즈음 삶이 내게 주는 질문은 '늙어감과 죽음'에 대해서다. 살면서 만나는 고통을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게 되면서 만나게 된 부분이었다라는 생각이 지금 글을 쓰면서 든다.
무의식적으로는 아직도 내가 '한계가 없고, 뭐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마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울'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남을 고백하게 된다. 한쪽이 밝으면 한쪽이 두껍게 그림자가 질 수밖에 없다는 학자의 이야기 처럼, 한 쪽이 너무 높고 밝게 비춰 그 반대의 그림자를 언뜻 언뜻 보게 되면서 좌절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이 찾아 올 때 마다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럽고 가끔은 혐오스럽기도 하다. 미미하고 작은 존재이며 실제로는 정말 하찮은 '나'를 그렇게 감추고 포장하느라 애를쓰며 살았단 생각을 해본다.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못 살아낸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언뜻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