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회사 점심시간에 양해를 구해가며 용인에서 서울에 있는 병원을 왕복했고, 아버지는 매일 하루 두 번씩 병원을 오가셨다.
마치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식사를 하고, 잠이 드는 것처럼 아버지와 나의 일상에 어느새 중환자실 시간표가 들어와 있었다. 여전히 엄마는 눈을 감고 의식 없이 같은 자리에 누워있었고, 처음에는 낯설었던 교대 간호사와 의사들도 이제는 너무 익숙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벗어나고 싶던 익숙함.
그리고, 또 하나 익숙해진 것이 바로 중환자실 앞의 분위기였다.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 두 번 각 30분씩 가능했다. 그나마도 한 번에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었다. 면회시간이 가까이 되면 중환자실 밖에는 면회객들로 가득 찬다.
그리고 면회객 수만큼 많은 바람과 기대와 좌절의 공기들이 마구 뒤섞여 떠다닌다.
생사를 넘나드는 배우자를 기다리는 할머니.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중년의 자매들.
갑작스러운 사고로 영문도 모른 체 엄마나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꼬마들.
사악한 중환자실 병원비 청구서를 받고 금액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계속 확인하는 이성적인 사람들까지...
1~2주 정도의 싸이클로 중환자실 밖 사람들도 바뀐다. 회복된 환자를 일반병실로 옮기며 바뀌고, 때로는 병원에 딸린 다른 건물로 영영 가족을 떠나보내며 바뀌게 된다.
그 사이클에서 완전히 예외인 사람들.
아버지와 나는 엄마를 한 달째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면회를 자주 오던 지인들도 자연스레 발걸음이 뜸해지고 있었다. 병원의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흘러가는 패턴이 익숙해질 때쯤 잘 버티시던 아버지도 결국 내 앞에서 무너져 내리셨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더라 의사가 그랬는데...힘들다고 나도 더는...
한 달 여가 지나는 시점에 의사는 아버지에게 엄마의 마지막을 넌지시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고지식하고, 강한 아버지도 의사의 말 한마디에 눈물을 보이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의사는 솔직했고, 의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최후를 예견할 수 있는 상태였다.
뇌출혈에 타격을 받은 뇌는 정상기능을 잃었고, 그다음은 폐렴이 왔고, 신장기능이 악화되어서 투석을 시작했으며, 이미 욕창은 시작되어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가까스로 안정시키고 돌아오는 길.
사실 아버지 못지않게 나도 이 끝이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너무 두려웠다. 엄마의 현재 상황에서 병원에서 전화가 온다면 이유는 딱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날 밤. 아버지의 무너짐을 억지스레 달래고 돌아온 그날 밤.
나는 더욱 간절해졌다.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상황의 끝은 캄캄한 죽음이었다.
더 이상 전화를 피해 뒷걸음질치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 밤 꿈에서만 환하게 웃는 엄마를 이제는 좀 만나고 싶었다.
엄마를 만지고 싶었고, 안아드리고 싶었고, 사랑한다고 한 번쯤은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간절함으로 나는 나의 신에게 간구했다. 아니 싸움을 걸었다. 몸부림을 치며 구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