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달 Apr 13. 2019

없다는 것의 '공허함' <러브리스>

<러브리스>는 제목만 보았을 때, 남녀 사이의 사랑이 식어가는 상황 혹은 그 사후의 냉정함을 다룰 것만 같았다. '러브-사랑'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작동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하면 으레 떠오르는 인물의 관계란 남녀 사이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범위는 (당연하게도) 그보다 넓게 펼쳐져 있다. 어쩌면 인간관계에 관한 모든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러브리스>가 가족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어서 이런 광범위한 사랑의 의미를 느낀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가족의 탈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원초적인 '관계의 상실과 부재'의 표상을 냉정하게 비추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외로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다(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이런 깨달음을 <러브리스>를 통해서 느꼈다. 아마 감독 자신도 그런 확장을 염두하면서 영화를 찍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러브리스>는 무언가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인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나 지금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 이들의 관계는 위태로움을 넘어서 이미 결론은 나온 상황이다. 이혼하는 일만 남았다. 아들은 이대로 엄마하고만 살 것이다. 각자는 새로운 사랑도 찾았고 아무튼 '파트너에 대해서는'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사람들이다. 한편 아들은 이들과는 달리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한 채 부서져 있고, 혼자서 공원을 걸어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실종되고, 뒤늦게 부부는 아들을 찾아 나서지만 어디에도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부는 아들을 찾아나선다.


과거에는 '러브리스'한 상황이었지만, 부부 각자는 이제 각자의 사랑을 찾은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부는 '알아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간 것 같다. 그러나 아들은 어떤가?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난 부부로부터 뒷전이 되고, 아들은 상실한 사랑을 되찾지 못한다. 상실한 그것을 찾고 싶었던 아들은 오히려 제 자신이 상실되는 방식으로 제 존재를 부부에게 알린다. 엔트로피의 법칙처럼 새로운 획득은 새로운 상실을 일으키는 듯이. 그제야 부부는 상실한 그것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상실한 그것은 영원히 그들의 곁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다시 시작되는 사랑(새 애인)'에 대치되는 '영원한 상실(아들)'의 구조가 명확하면서도 깔끔하게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분량이 짧기는 하지만) 아들의 표정이 가히 압권이라, '러브리스'라는 냉정한 제목에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러브리스>의 연출은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이창동의 영화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무채색으로 칠해진 듯하면서도 감정적으로 폭력적인 순간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이런 순간들은 점점 쌓여가면서 큰 상처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상처라고 인지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삶을 살아온 우리들은 그것이 상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런 류의 영화들은 우리의 삶이 슬픔과 상처를 빗겨나갈 수 없다는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새 빨려든 삶의 정치학 <바이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