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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n 10. 2019

희망의 끈을 잡고 읽었다 <무해의 방>

진유라 / 은행나무

당연하게도 나는 이 소설의 제목에서의 '무해'가 무해(無害)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제목  '00의 방'이 지시하는 공간은 유해하지 않고 해가 없는,  쾌적한 어떤 기분을 제공하는 곳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고 무해는 주인공의 이름이라고, 소설이 거의 시작하자마자 나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해'라는 이름에는 왠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거둘 수는 없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니까. 아니면, 이 단어에서는 왠지 바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안개 가득한 물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개인적인 감상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런 상상과 함께 <무해의 방>을 읽었다는 사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요하면서도 망망한, 하지만 어떤 검은 슬픔이 드리운 것 같은 공간의 느낌 때문이다. 그리고 왠지 '무해'라는 이름의 첫인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소설의 소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우리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들이 우리 사회 안으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 대해서도 큰 균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주인공 '무해'의 무해함을 사전에 깊이 인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탈북자 출신인 '무해'에게 초로기 치매가 찾아오며 그의 딸인 모래에게 그녀의 비밀-이라기보다는 지난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북한 압록강 근처 혜산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보게 된 강 건너편의 반짝이는 빛에 닿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기로 한다. 그리고 산전수전을 겪으며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귀순하게 된다.


배경이 배경이다보니 배고픔에 대한 절실함이 주인공을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다. 물론 <무해의 방>은 그 문제를 르포식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매 순간은 배고픔에 대한 고통과 트라우마를 문신처럼 새기고 있었다. 사실 '배고픔'을 다룬다고 해도 정말 '식량'에 대한 한정적인 고민을 다룬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식량이나 인권 문제에 대해 풍족하게 살고 있는 우리는 식량에 관한 문제라 한다면 딱 그 단어에만 매몰되어 '먹는 일' '먹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곤 한다. 사실 이것은 인간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말이다. <무해의 방>은 바로 그 배고픔이라는 감정과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식량에 관련한 문제를 북한의 음식과 실향민의 그리움, 그리고 '맛'이라는 감각을 통해 푼 소설이기도 하다. <무해의 방>에서는 북한의 몇 가지 음식에 대한 설명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는데, 그 음식이 만들어진 이유와 만들어지는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왜 먹을 것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의 삶의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무해의 방>은 사실 짧은 분량 치고는 읽기가 좀 버거웠던 소설이다.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이야기의 소재 자체가 '멀면서도 사실은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등장인물 중 '모래'의 태도는 상당히 희망적이었고 어떤 끈을 놓지 않는 의지가 있는 인물이라 그 힘을 따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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