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우리 자신에 대한 많은 것을 드러낸다.
대학교 3학년 이후였나, 그때부터 갑자기 선후배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 좋은 말로 아웃사이더, 정확한 말로 왕따였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찾기는커녕 나라는 사람을 아는 이도 드물었다. 그런데 3년 정도 내가 돌아다니는 꼴을 보다 보니,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대체 내가 왜 무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야말로 학교와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을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아했다.
그들이 나를 찾은 이유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몇 번은 영화의 의상 담당이었고, 배우였던 적도 있다. 처음 출연한 영화는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을 결심했으나 미래에서 온 자신의 아들을 만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여고생이 나오는 그런 영화였는데, 내가 바로 그 여고생 역할이었다. 무려 14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그 영화와 나의 발연기를 생각하니 얼굴이 빨개진다. 또 한 편은 후배의 장편영화였는데 내 역할은 여형사. 그 후배는 얼마 전 하정우와 <더 테러 라이브>를 찍었다!
아무튼 내가 의상 담당으로 캐스팅이 된 이유는 “네가 옷을 재미있게 입어서”였다. 잘 입는 것도 아니고, 멋지게 입는 것도 아니고, 센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게 입는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옷을 재미있게 입는 사람. 돌이켜 보니 그 시절 나는 거의 발악이라도 하듯이 이상한 옷을 입고 다녔다. 처음엔 힙합바지부터 시작했다.(그렇다. <건축학개론>에 나온 그 힙합바지 말씀이다.) 인도에서 산 티베트 원피스도 입고 다녔다. 군복 천을 떼어다 외할머니의 재봉틀로 대충 박아 무릎길이 스커트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입으면 시베리아 곰처럼 보이는 갈색 아크릴 털코트도 입고 다녔다. 쇼킹 핑크색 카디건도 입었고, 배꼽이 다 드러나는 짧은 티셔츠도 입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부끄럽다. 그때 사진을 많이 찍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다.
그런데 나더러 옷을 재미있게 입는다고 한 사람들은 아직도 <영웅본색> 포스터와 주윤발의 바바리코트가 바람에 나부끼는 시절인 줄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으니 내가 재미있어 보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옷 입기에 관심이 많았다.
왜 그랬느냐 하면 유치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옷으로 초라함을 감춰 보려고 했다. 어느 날 복도에서 1년 후배였던 배두나를 마주쳤는데 그 애는 1980년대에나 입던 빛바랜 청셔츠에 청치마를 입고 있었다.(그렇다. 요즘 유행인 그 청청패션!) 그런데도 배두나는 어쩐지 있어 보였다. 한창 밀리터리룩이 유행일 때 내가 동대문에서 산 싸구려 밀리터리 벨트를 하고 학교에 가자 사람들이 그 벨트 멋있다며 감탄하더니 “어제 배두나가 하고 온 벨트는 크리스찬 디올 거라던데 확실히 차이가 나네.”라고 덧붙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배두나와 나는 사실상 대화 한 번 나눠본 적이 없고 그 사람은 내 존재조차 모를 테지만, 나는 내심 나의 라이벌을 배두나로 꼽았다. 아니다.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포기가 빠르고 질투심에 몸부림치느니 내 멋에 사는 쪽을 택하는 스타일이다. 그 편이 정신건강에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배두나야 어떻게 살든 관심도 없었다.(흥!)
이제 나는 옷을 재미있게 입는 사람이 아니다. 잘 입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패션에 한창 꽂혀 있던 20세기 말과 지금은 격세지감이라는 사자성어의 뜻이 팍팍 와 닿을 정도로 달라졌다. 20세기 말의 남자들은 염색이라곤 하지 않았고, 파마 같은 것도 하지 않았고, 얼굴에 뭘 바르지도 않았고, 그저 폴로 티셔츠와 벙벙한 청바지에 이스트팩 백을 메고 다녔다. 20세기 말에는 구하기 힘들었던 글로벌 트렌드의 옷과 가방과 구두들을 지금은 너무나 쉽게, 그것도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득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패션에 관심이 적어졌다. 요즘은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입는다. 거의 매일 청바지에 티셔츠다. 이제는 내게 어떤 옷이 어울리고 어떤 옷이 어울리지 않는지도 대충 감을 잡게 되었다. 그러니 더 이상 실험을 하지도 않는다(오로지 뱃살을 가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어쩌면 게을러진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요즘 재미있게 생각하는 옷 입기는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방식이다. 그는 별로 특별하게 옷을 입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항상 구겨진 옷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새 트렌치코트를 사면 입은 채로 샤워를 해서라도 구깃구깃하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게 또 그렇게 멋있었단다.
이제 나는 마흔을 앞두고 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이 나이에 로맨스가 닥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심지어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나를 싫어한다). 가슴은 납작해지고 배는 나날이 부르고 있다. 다들 내가 뭘 걸치고 다니든 그냥 날 ‘아줌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뭘 어떻게 입든 남의 눈까지 신경 쓸 이유는 거의 없을 것이다. 뭘 입든 내 자유다. 남자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다. 정말 좋다.
그러니까 나도 일부러 구겨진 옷을 입어 봐야지. 전에 자라 매장에서 본 할머니처럼 흰 머리에 은색 타이즈를 신고 그 아래 나이키 운동화를 신을 수도 있을 것이고, 횡단보도에서 마주친 할머니처럼 표범무늬 원피스에 긴 목걸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를 짧게 잘라보고 싶기도 하다. 남편은 남자 같다며 질색을 하겠지만 뭐 어때(흥!). 남자처럼 입든, 요부처럼 입든 아무도 내게 관심 없을 텐데.
무슨 옷을 입어도 그 옷이 내 몸에 피부처럼 착 달라붙었으면 좋겠다. 그다지 많은 옷도 필요 없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옷이 열 벌 내외로 걸린 옷장 하나만 가졌으면 좋겠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그 옷들로 살았으면 좋겠다. 걸레가 될 티셔츠 같은 건 이제 좀 그만 샀으면 좋겠다. 그 티셔츠 다섯 벌쯤 살 돈을 모아 진짜 좋은 셔츠 한 벌을 샀으면 좋겠다. 하지만 문제는 다섯 벌의 티셔츠를 사는 기쁨을 버려야 한다는 일이다. 다섯 번 기쁠 걸 한 번 기뻐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 좀 좋은 것 좀 입어봐야지, 라고 다짐하고 산 옷은 몇 번 입고 나면 왜 이걸 돈 주고 샀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마련이다. 아, 어쩌면 좋을까.
갸랑스 도레라는 프랑스 여자가 있다.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 <사토리얼리스트> 블로그의 스콧 슈먼과 한때 연인이었다. 1달러짜리 페도라에 남자친구의 흰 셔츠와 고무 슬리퍼로도 멋을 낼 수 있는 여자다. 그런 열린 태도가 마음에 든다.
옷은 우리 자신에 대한 많은 것을 드러낸다. 또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많은 것을 감춰줄 것이다. 사실 갸랑스 도레는 열린 태도를 갖추지 못했으나 열린 태도를 꾸며내는 테크닉을 가진 여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외모가 왜 중요하냐, 내면이 중요하지, 라는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인간에게 눈이 달린 이유는 어쩌면 눈으로 판단하기 위해서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외모나 피부색이나 옷차림으로 그를 판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간사한 본능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답게 옷을 입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다운 것이란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 또 무엇을 싫어할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런 고민의 결과가 우리의 스타일이 된다. 어쩌면 스콧 슈먼이 말했듯이 그런 고민의 과정이야말로 진짜 스타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