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튜브 이벤트 댓글에 썼던 글인데 아까워서 여기에 남김)
한강 작가의 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허는 작품은,
『희랍어 시간』입니다.
고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어라는 언어를 배우는 과정과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해 삶과 죽음, 기억과 소멸, 그리고 언어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합니다. 많은 이들이 한강 작가의 대표작으로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를 떠올리지만, 이 초기작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독자에게 진한 인상을 남깁니다.
『희랍어 시간』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깊은 상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의 삶은 완전히 흔들리고,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그는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단순히 단어와 문법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과 관계를 복원하려는 치열한 여정이 됩니다.
한강 작가는 이 상실의 과정을 단순히 고통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과 침묵, 언어의 존재와 부재를 통해 상실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상실을 극복하려는 시도이자, 그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다시 찾으려는 행위입니다. 독자는 주인공이 새롭게 만나는 그리스어의 낱말 하나하나에 담긴 온기와 생명력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기에, 소설은 독자에게 말과 침묵의 경계를 끊임없이 사유하게 만듭니다.
『희랍어 시간』은 제목부터 철학적입니다. “희랍어”와 “시간”이라는 두 단어는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룹니다. 언어는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단어들은 시간이 지나며 잊히거나 변형되기도 하고, 또 다른 시간 속에서 부활하기도 합니다. 한강 작가는 이러한 언어의 시간성과 인간 삶의 유한성을 연결 지으며,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깃든 기억과 역사를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이 작품에서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처를 대면하고, 고통을 기록하며, 결국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강 작가는 언어가 만능이 아님을 동시에 말합니다. 언어는 한계가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실과 슬픔의 일부는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우리가 그것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처럼 언어의 치유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그려내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요소입니다.
『희랍어 시간』은 단어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공백과 침묵,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운이 독자의 상상과 감정을 자극합니다. 한강 작가 특유의 서정적이고 절제된 문체는 군더더기가 없으면서도 풍부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느껴지는 묵직한 여운은 마치 오랜 시간 남아 있는 메아리처럼 독자의 마음을 울립니다.
작품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에 더 많은 고민이 담긴 듯 보입니다. 침묵과 여백 속에서 독자는 주인공의 고통과 자신의 기억을 끌어내며 조용히 작품과 대화를 나눕니다. 이러한 문학적 접근은 독자가 단순히 이야기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게 만듭니다.
『희랍어 시간』은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격정적이거나 사회적 메시지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내밀한 이야기로 독자의 감정 속 깊은 곳에 다가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의 특별함입니다. 대단한 사건이나 극적 반전 없이도, 이 소설은 잔잔한 파도처럼 독자의 의식에 스며들어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설 한 권을 읽는 것을 넘어, 자신의 상실과 기억을 돌아보고 언어와 삶의 관계를 사유하는 여정을 떠나는 것입니다. 한강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도 차분한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과 대면할 용기를 줍니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여전히 언어를 통해 살아가는 이유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희랍어 시간』은 반드시 경험해야 할 소설입니다.
잔잔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울림을 가진 이 작품은, 독자에게 한강 작가의 문학 세계가 얼마나 넓고도 깊은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