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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Apr 20. 2020

현실감 없이 산다

현실감 없이 살았다. 미래만 봤다. 현실=고난이니 매일은 머릿속에 붕 띄웠다. 그런 10대, 20대 일부를 보내니 습관이 됐다. 현실=고난, 해결 방법=잊지, 미래 생각하기, 무한 긍정회로 돌리기였다. 돌아보니 어쩌면 그래서 현실감 없이 살았다고 말장난 치며 해석해볼 수 있겠다. 지나온 과업들은 내게 당연히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지 그것이 힘들다고 질질 짜고 주저앉거나 툴툴댈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시간이 없었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 머리에 입력된 값이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만을 달리기에도 시간은 부족했다. 이것저것 챙길 건 많았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하기 싫은 걸 더 많이 해야 한다. 그걸 하기 싫은 거라고 명명할 용기도 시간도 내겐 없었다. 그저 기쁘게 해내야 할 과업들이었을 뿐이다. 학점을 따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맞설 것에 맞서고 그 외 챙겨야 할 활동들, 점수들, 관계들을 챙겨 나가는 건 고민의 대상이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내가 제목이랍시고 적은 '현실감 없이 산다'는 건 그러니까. '현실 고민 따위 제대로 하지 않고 해결만이 최고 방책, 자잘한 고민은 뭉갠 다음 목표를 위해 달리며 산다' 정도로 해석해볼 수 있겠다.


언젠가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사랑 타령하려고 쓰는 건 아니다. 아직도 그를 만나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고 확신하니까. 그 때 나는 어린 나이에도 모두를 밀어내는데 익숙했다. 이제야 조금 나아질 기미를 보이는 부분이니까 그 땐 그냥 그게 당연했다. 어느 날은 좋아하는 사실이 답답해서 울었다. 만나자면 만나면 되는데 그게 싫었다. 내 할 일이 더 중요했다. 지금도 그렇다. 내 일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중요했고 내가 가야 할 과업이 산더미니 다른 게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들어오는 인연들은 산더미 같은 과업에 치여 밀어 뒀다. 돌아보니 사랑은 지천에 있었다. 내가 선택한 건 일을 사랑하는 행위다.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하던 대답에 근래의 나는 '그래 역시 잘한 일이었어' 하고 답한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일에 대해 의문이 들던 거였다. 삶이 너무 버거워서 그랬다. 최근 몇 달 정도 말이다. 이젠 그렇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남의 눈을 그리 신경쓰는 인간은 아니다. 친하지 않은 이들이 뭐라고 떠들던 상관없다. '그런 면도 보이나보네? 아닌걸 오해네' 하고 만다. 속으로 말이다. 최근 들어 친한 이들이 나를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치켜 세우거나 '너는 착착착 뭘 했잖니 난 아니야 난 충동적이야'라거나 '계획적인 사람이니까 현명한 말만 하잖니 그러니 네가 한 말을 다 따를래' 등의 말을 듣고나니 '어랍쇼' 싶었다. 나는 계획적인 인간은 아니다. 정말이다. 뭐 겸손하자거나 재수없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하고 싶은 걸 별 생각없이 할 뿐이다. 이유가 뭐냐고? 그게 제일 재밌다. 그것 말고는 할 것도 없다. 시간은 언제나 가장 바쁜 자의 몫이다. 최근 들어 건강 관리라는 이슈가 생겼지만 그건 따로 말하기로 하자. 어쨌든, 시간은 바쁜 자의 몫이며 한 번 사는 것, 나는 해보고 싶은 건 하고 싶다. 그건 내게 일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대들도 어찌 보면 내게 '계획적'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여행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놀러 다니는 것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를 꾸준히 하는 그대들, 여행을 멋지게 다녀오는 그대들의 하루들이 내겐 계획적인 하루들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는 게 아니다. 예를 들자는 거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뿐이다. 나는 충동적인 인간이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유도 그렇다. 영화를 여러 편 몰아 보던 취미도 그렇다. 수영과 요가를 많이 하던 취미도 그렇다. 무작정 몇 시간 걷던 취미도 그렇다. 이직도 그렇다. 뭐든 그렇다. 나는 그저 마음의 소리에 늘 귀를 기울였을 뿐이다. 마음이 하고 싶은 걸 따라 주었을 뿐이다. 그래도 마음은 멍울지는 것이니 보상을 해주는 거다. 일이라는 항목만 다를 뿐이지 인간에겐 다 이런 항목이 있다. 해서 나는 '모두가 금수저'라는 말을 몇 년 전부터 좋아했다. 좋아하다는 선호가 들어가니 부적절해 보이지만 그랬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 말대로 살아온 것 같다. 어린 시절,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한 '강남 사교육 어쩌구' '8학군 어쩌구' 하는 책 형식의 책도 아닌 글 따위 (교육 도서라고 해둘까?)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던 기억이 요즘 가끔 난다. 그 어린 애가 그걸 들고 어떤 박탈감을 느꼈던 걸까. 수년간 몰랐는데 최근 들어야 그런 생각을 했다. 아, 그 때부터 그걸 들고 읽으며 어이없어 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뽑아낼(?) 걸 뽑겠다고 책을 읽어보았던 어린 아이여. 참, 신기한 애였네. 특별하다는 게 아니라, 지금 굳이 생각하니 신기한 애였다고 혼자 생각해봤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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