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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ug 11. 2020

애플망고 2를 구하라!

펍 크라울은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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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란 보통 사람보다 더 용감한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보다 5분 더 길게 용감할 뿐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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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침대 8명이 꽉 찬 방에 머물다 보면 새벽같이 길 떠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보통은 전날 저녁 짐을 다 챙겨두지만 그렇지 않은 여행객도 많다. 내 맞은편 침대의 대만인은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 가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어젯밤부터 룸메이트들에게 미리 사과를 했다. 자기가 준비하는 소리 때문에 아침잠을 깨울지도 모른다고. 근데 그녀가 사과할 부분은 전혀 다른 포인트였다. 밤새 쩌렁쩌렁 고성능 우퍼가 장착된 현란한 코골이 사운드를 들려줬기 때문. 새벽 6시 20분. 아… 찌뿌둥하네, 나는 그녀가 준비하고 나갈 때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먼 길 떠나 순례하는 마음에 혹시라도 짐이 될까 봐.




간밤 2060 호스텔 공용 라운지에서는 깨 볶는 커플, 내일의 여행설계에 집중하는 친구들, 주방에서 인연을 맺은 캐나다의 애플망고 2인조와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젊은이들이라 말도 빠르고 의사 표시도 분명하다. 리얼타임의 의사소통이 어렵긴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동양 여성에 대한 나이 가늠을 전혀 못하는 관계로, 내 나이가 밝혀지면 모든 사람이 약속한 듯 괴성을 지르며 언.빌.리↗버↘블!! 난리를 친다.

뭐 그렇게 한 캇트 받았음 됐지★.


때마침 9시 무렵 시작되는 2060 호스텔 투어(마드리드 체험 프로그램)의 참여를 유도하러 직원 한 명이 올라왔다. 하루는 워킹 투어, 하루는 타파스 투어 등 매일 돌아가며 유 · 무료 투어가 진행되는데 어제는 어느 호스텔이든 참여율이 가장 높은 ‘마드리드 펍 크라울(Pub Crawl, 정해진 Pub과 Club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의 날이었다. 다들 들뜬 마음으로 참여의사를 밝히곤 꽃단장을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쇼 씨는? 솔직히 엄청 관심 있지만 술도 마실 수 없고, 다음 날 아침 따뜻한 추로스 사수를 위해(늦으면 금세 품절) 미안, 그건 안 돼. 대신 내일 한다는 역사 지구 워킹 투어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2060 호스텔 공용공간, 벙커


새벽 6시 40분, 결국 기상 ㅠ. 객실 샤워실을 이용하면 바로 옆 침대 아이들이 깰 테니 공용 샤워장으로 향한다. 여성용 샤워장엔 변기 2칸, 샤워실 2칸이 있다. 그중 한 곳은 막 출근한 청소 아주머니가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들어가셨고, 한 곳은 배수구가 막혀 있어 나는 세면대에서 양치를 하며 아주머니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때 뒤뚱뒤뚱 술이 덜 깨 보이는 애플망고 2가 들어왔다. 우와우… 꼴이 말이 아니네! 용변을 보고 나온 애플망고 2에게 세면대를 쓱- 양보했다. 그녀는 땡큐, 하고 웃으며 손을 씻고 물러났다. 어제 펍 크라울에서 부어라 마셔라 광란의 밤을 보냈나 보구나. >.<


세면대에 얼굴을 묻고 호쾌하게 입 속을 헹궜다. 그때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샤워실 문이 열리고 청소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아, 그 소린가보구나’하고 계속 양치를 하는데 “아라아라라!!”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다. “왜? 왜요?? 왜???” 거울 속에 비친 아주머니의 표정과 손끝을 확인하고 복도를 내다봤다. 우리의 애플망고 2, 금발의 아가씨가 大자로 뻗어 경련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달려가 손을 잡고 그녀를 불러본다. 눈꺼풀과 안구도 떨리고 초점도 잃었… 큰일이다. 순간 입을 뻐끔거리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바로 그때 위층에서 출타를 준비 중인 한 청년이 계단으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콜, 콜 더 매니저, 스탭. 애니원. 플리즈!!!!”


1-2초,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청소 아주머니 역시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도 애플망고 2라 별명까지 붙이며 만난 인연인데, 그냥 놔둘 순 없었다.


“Hey, Are you OK? You know me, the Korean. I’m here.”


내 영어가 너무 구려서 미안해. 그때였다. 그녀가 내 손을 꼬옥 맞잡았다. 의식은 있구나. 얼른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어 봤다. 피가 나오진 않았다. 다행이겠지? 드디어 그녀가 말하기 시작했다. 캐나다 애라 영어일 텐데, 뇌진탕의 여파인지 그녀의 발음이 뭉개져 단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수건으로 그녀의 머리를 받쳐주고 차디찬 팔과 발을 주무르며 혈액순환을 시켜줬다.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게다가 맨발의 청춘이었다. 신발은 어디 간 거지? 그 모습을 보고 청소 아주머니도 깨끗한 시트를 하나 꺼내와 애플망고 2에게 덮어줬다.

2060 호스텔  여성 전용 화장실+샤워실


새벽 6시 50분. 드디어 뛰어 내려갔던 청년과 야간 매니저가 올라왔다. 현 상황을 청소 아주머니께 브리핑받은 그는 애플망고 2에게 말을 걸어보았으나 역시 알아듣지 못했다. 이젠 앰뷸런스 밖에 없다. 어디서 본 건 있는 내 입에서 “콜 나인 원원”이 자동 발사됐다. 미드의 힘이로구나! 내가 미드를 하도 많이 봐서 말을 하진 못하지만 들리는 간단한 문장은 곧잘 의미를 알아듣는다. 그 덕에 해외 뮤지션 내한공연 수행도 하고 해외 뮤직 콘퍼런스에도 초청되고 했으니까. 어쨌든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911에 전화했고, 무리하게 그녀를 옮기지 말라는 911의 지침을 일러줬다. 그리고 자기는 로비에서 앰뷸런스를 기다릴 테니 나와 청소 아주머니가 그녀의 곁을 계속 지켜 달라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주 어렵게 쥐어 짜낸 영어로 매니저에게 말했다.


“She has a friend!! companion!!!”


하지만 그는 도리어 나에게 그 친구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차마 '빨간 머리, 애플망고 1'이라 할 순 없어 나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매니저는 내려가 버렸고 나는 다시 애플망고 2와 대화를 시도했다.


‘Yesterday’, ‘Headache’, ‘Disease’, ‘Hangover’, ‘Weak’. 진짜 천만다행으로 아는 단어들이 조금씩 들렸다. 종합해 보건데 어제 펍 크라울에서 얘가 뭘 잘못 먹은 듯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서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 울지 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나는 ‘우리가 앰뷸런스를 불렀고, 그때까지 같이 있겠다’는 말을 계속해줬다. 그리고 미리 외워온 한 문장 'Sorry, I’m not good at English(미안, 나 영어 잘 못해)'도 덧붙였다. 그녀는 또다시 내 손을 꼭 잡으며 입모양으로 땡큐를 말했다.


이제 7시 10분. 제법 정신이 돌아온 그녀에게 “What Happen?”이라 묻자 더 자세한 이야길 들려줬다. 펍 크라울에서 Free Drink들을 마셨고, 그중 어딘가에서 약을 먹은 것 같다고 추측했다. 술을 퍼마신 것도 아닌데 자신이 점점 나약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친구가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데리고 호스텔까지 돌아왔지만 이 정도의 두통과 행오버는 처음이라며, 방금도 토할 것 같아 방에서 나왔다가 이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래, 그랬구나. 이제 옆으로 누울 수 있게 된 그녀의 등을 살살 두들기고 문질러줬다. 그리고 물었다.


“너 방 몇 호야, 출입카드 있지? 친구 불러줄게. 근데 걔(애플망고 1) 이름이 뭐니?”


그녀(애플망고 2)의 발음을 그대로 적자면 친구(애플망고 1)의 이름은 ‘아니코-어-ㄹ’였으며 방문을 열고 ‘롸잇 스트레잇 웨이, 톱 플로어’하면 있다고 했다. 이름을 재차 확인한 후 방 카드를 손에 쥐고 청소 아주머니께 보여주며 “아미고(친구), 우노 땡 뜨레스(103호)”라고 하자 신기하게 알아들으셨다. 함께 103호로 달려가 문을 열고 보니 남녀 혼성 8인실! 해괴한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중요한 임무부터 해결해야지. ‘롸잇 스트레잇 웨이 톱 플로어’의 아니코어를 찾자! 근데 가서 보니 이름표에 전혀 다른 철자가 쓰여있다. 애니콜도 니콜도 아닌 켈리 뭐시기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2층 침대에 2칸은 비어있고 하나는 남자, 하나는 여자가 자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문 열고 똑바로 직진하면 2층’에 있었으니 일단 얘를 깨워보자. 아니면 쏘뤼.


“헤이, 헤이, 아니코-어-ㄹ?”

“예스, 아이엠.”

“유어 프랜드.”

“와이? 쉬 헐??


역시 밤사이 애플망고 2는 계속 아팠던 모양이다. 그리고 빨간 머리 아가씨 애플망고 1의 이름은 어쨌든 아니코어가 맞나 보다. 나는 또 판토마임에 가까운 연기를 선보이며 말했다.


“응. 엄청. 시리어스. 쉬즈 다운. 원츄 씨 유.”


내가 뭐라는지 나도 모르지만 아니코어는 대충 알아듣고 같이 방을 뛰쳐나와 복도에 드러누운 애플망고 2를 확인했다. 둘은 나직이 대화를 나눴다. 아니코어는 앰뷸런스가 곧 도착한다는 이야길 듣곤 옷과 전화기, 신발을 챙겨 돌아왔다. 애플망고 2는 아빠와 통화를 하며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현듯 저 아빠가 영화 [테이큰]의 리암니슨이 되어 마드리드로 날아와 내 딸에게 환각제 먹인 놈들을 단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펼쳤다. 그리고 내가 스물에 딸을 낳았으면 너희랑 같은 나이였…


애플망고 2는 아빠와의 통화가 끝날 무렵부터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중독 치료 중인 환자들이 일으키는 경련처럼 정말 심하게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2060 호스텔 내부 문구. 그래도 난 안 갈란다 워킹 투어.


7시 45분. 응급구조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뭔데? 한 시간이나 지났다구요! 우리나라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게다가 응급구조원 모두 영어를 하지 못해 호스텔 매니저가 동시통역을 하다가 지쳐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의료보험 가입 여부. 당연히 스페인 보험은 없고, 여행자 보험도 들지 않았고, 캐나다에서도 보험을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스페인에선 보험이 없다면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고 했다. 일단 의식은 돌아왔으니 버틸 수 있다면 침대에서 쉬어도 좋지만 뇌진탕을 크게 겪었으니 선택은 네 몫이라며 애플망고 2에게 공을 넘겼다. 그녀는 아빠와 통화할 때 미리 허락을 받았으니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나는 애플망고 2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바래다줬다. 문이 닫히기 전, 그녀에게 ‘take care’라고 인사했다. 그녀는 땡큐라며 손가락으로 피스 마크를 그려 내게 날렸다.


7시 58분. 주방에 내려가니 다 식었지만 추로스 8개가 남아있었다. 양심적으로 6개만 접시에 담아 따뜻한 국화차, 핫초코를 곁들어 폭풍 흡입했다. 찬 복도 바닥에 앉아 사람을 구했으니 6개는 괜찮겠지? 아하하하하.


그리고 이틀 뒤, 레티로 공원 산책을 위해 호스텔을 나서는 길에 체크아웃하는 그녀들을 마주쳤다.


“You save my life.”


눈 밑에 다크써클이 폭삭 내려앉은 애플망고 2였지만 밝은 미소였다. 스페인이라 의사소통이 힘들어 정확히 어떤 약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혈액에서 독소 반응이 있었다고 했다. 두통이 사라져서 무엇보다 좋다며 고맙다고. 남은 여행도 잘 보내라고. 우리는 서로를 다독이며 살며시 포옹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의 로망이었던 호스텔 투어 프로그램 참여는 안 하는 걸로.

인류 여러분, 남이 주는 거 덥석덥석 마시면 안 돼요.

애플망고 2를 구한 아침,  추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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