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신도각
커다란 중식 팬, 웍을 달군 후 식용유를 붓는다. 박력 있게 다진 마늘, 파, 생강을 한 움큼 넣는다. ‘촤아~’ 사람 잡는 소리와 향미가 퍼지면 돼지 등심을 추가한다. 이때 간장을 웍 가장자리에 두르면 불향이 입혀진다.
양파, 호박, 감자, 당근, 양배추를 잘게 썰어 넣고 볶다 짜장 분말 투하! 이제부터 화려한 불쑈(라 쓰고 ‘분노의 웍질’이라 읽는다)가 시작된다. 팔꿈치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파지면 채즙이 우러나온다는 신호다. 전분을 살짝 풀어 농도를 잡아주면 나만의 짜장 완성!! 이 정도면 중국집 부럽지 않은 가정식 짜장왕으로 등극할 수 있다.
짜장에 이렇게 진심인 이유는, 나의 큰집 ‘신도각’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큰집의 짜장 소스는 그 어떤 중식당에서도 만나볼 수 없는 기품을 지니고 있다. 모든 손질 과정을 기계 없이 손으로 직접 하기 때문이다. 큰집 주방에선 전자레인지, 믹서기, 세척기, 포장기를 볼 수 없다. (심지어 세탁기도 없어!!!!!)
면 반죽도 오직 손으로 한 뒤, 국수 모양을 뽑을 때만 60-70년대에 생산된 무동력 제면기를 쓴다. (손으로 돌리는 파스타 제면기와 같은 모양새) 심지어 배달도 자전거로 했다. 백종원 아저씨도 말했잖은가? ‘사장이 불편해야 손님이 편하다고.’ 그래서였을까, 동네 터줏대감으로 개점 50년을 향해가는 큰집 '신도각'은 동네를 떠난 사람들이 추억을 되새김하듯 찾아와 주는 곳이다.
어릴 땐 매일 짜장을 먹고 일손을 돕는 게 좋았다. 초등학생이 홀 서빙, 배달 주문, 장부기입도 잘해 동네 사람들마다 칭찬을 해줬다. 하지만 그런 모습 뒤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밥값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자리했었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되면 일하는 엄마 대신, 큰집 주방 한쪽에서 동그랑땡을 빚고 전을 부쳤다. 마주 앉은 할머니와 고모는 나 따윈 잊은 듯 일이 끝날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털어냈다. 내가 뻔뻔해지는 법을 배운 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스물이 넘은 뒤론 큰집에 가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부모님의 맞벌이는 진작 끝났고, 가정 형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고, 어깨너머로 배운 중식요리(짜장, 마파두부, 잡채 등) 스킬도 능숙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서러움이 떠오를까 봐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 같다. 어른들은, 아이도 흘러가는 말까지 다 알아듣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 결혼과 함께 은평구로 돌아왔다. 공교롭게 신혼집 옆 동네에 신도각이 있었다. 남편에게 짜장도 맛 보이고 어른들께 인사드릴 겸 오랜만에 큰집을 찾았다. 몸이 많이 약해진 큰아버지를 위해 팥죽과 대추차를 가져갔더니 큰어머니가 명품 짜장 소스를 한 솥 싸 주셨다. 그 짜장 소스는 집으로 들고 오는 내내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사실 큰아버지 큰어머니만큼은 단 한 번도 조카들에게 눈치를 준 적이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할머니가 구박을 좀 많이 하셨을 뿐.., 학교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무 포렴을 촤라라~ 넘기며 들어가면 큰아버지는 "어, 왔니", "어, 어서 와라" 라며 반겨 주었고 큰어머니는 내가 짜장에 밥을 비벼 먹을 것임을 알면서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주미 뭐 먹을래?"하고 물어보셨다. 다 먹고 나면 요구르트 한 병도 꼭 주셨다. 탕수육이나 군만두, 라조기 같은 요리부 주문이 들어오면 내가 먹을 간식으로 작은 반찬 그릇에 빼놓았다가 따로 주셨다. 그렇게 막둥이 조카의 피와 살은 신도각의 짜장밥으로 채워졌다.
어느 날 '사딸라 - 궁예’로 유명한 김영철 씨가 진행하는 TV프로 <동네 한 바퀴>를 보게 되었는데, 뜬금없이 우리 큰아버지가 궁예 아저씨와 마주 앉아 간짜장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뭐죠??) 그동안 신도각은 맛집 소개 프로, 드라마, 세트장 등 각종 미디어 섭외 요청에 단 한 번도 응한 적 없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알고 보니 궁예 아저씨를 앞세워 방송국 놈들이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던 것).
다음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큰집으로 달려갔다. (프리랜서 화이팅!) 멀리서 봐도 사람들이 줄 서있는 게 보였다. 마침 레트로가 유행인지라 30년 전 큰아버지가 외부 유리에 손수 붙여 고안한 썬팅 장식과 자전거, 요샌 보기 드문 화단의 분꽃은 셀카의 성지가 되어버렸다. 빗발치는 전화에 수화기는 내려놓은 상태였다.
“큰엄마, 큰아버지! 나 왔어. 힘들죠?”
두 팔 걷어붙이고 주방에 가보니 큰아버지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에 불편한 몸으로 면을 뽑고 계셨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큰어머니는 요리하다 쓰러지실 기세였다. 나는 바로 앞치마를 메고 일손을 도왔다. 멀리 지방에서 방송을 보고 달려온 한 중년 부부는 면 반죽이 떨어져 판매할 수 없는 상황에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죄송하다며 난로에서 뭉근히 끓여낸 옥수수+보리+결명자 차를 내어드렸다. 근데 그 차가 또 명품인지라, 두 잔을 꽉 채워 드신 뒤 진정하고 돌아가셨다. 허허허.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메뉴판을 새로 만들어드리기로 했다. 몇 년 전 까진 거뜬히 만들어 내었던 양장피, 팔보채, 고추잡채, 난자완스 등의 요리부는 이제 감당할 수 없었고, 손님께 어렵다고 설명을 드리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테이블에 부착할 개별 메뉴판을 만들고 홀에 붙여진 메뉴 이름들을 가릴만한 게 필요해 보였다. 빠르게 프린트를 마치고 코팅이 되는 문구점을 찾다가 결국 신도각 근처까지 갔다. 코팅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문방구 사장님이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뉘슈?"
"네?"
"내가 이 문방구를 20년 했는데, 신도각에는 아가씨 같은 딸은 없는데. 손자라기엔 나이가 많아 보이고."
"아, 저는 작은 집 조카예요. 막내 조카입니다."
"그럼 OO형님 딸이요?"
"네, 둘째 딸이요."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이후 지방에 내려가기 전까지 한 달간 신도각의 노부부를 위해 폭풍처럼 몰려오는 손님들을 접객했다. 그래도 두 분껜 벅찼는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셨고, 일가친척 모두 장사를 그만하자 설득해보았지만, 두 분은 몸이 허락할 때까지 중국집을 지키겠다는 고집스러운 말만 되풀이하셨다.
제주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던 올해 2월, 큰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간밤에 큰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졌어.”
“어?”
“큰 아버지는 거동도 힘든데 치매도 와서 요양원에 모셨고.”
“어어???”
“코로나 때문에 양쪽 다 면회 금지라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네...”
“어머, 어떡해... 언니는, 괜찮아?”
수화기 너머 정적을 느끼며 한숨만 내쉬었다. 인간이기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섭리를 거스를 묘책도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위로할 따름이다. 전화를 끊고 나는 정처 없이 걷다가 슈퍼에 들러 오뚜기 짜장 분말을 한 봉 사 왔다. 양파와 대파를 사정없이 다지는데 눈물이 났다. 내 팔꿈치가 아플 때까지 팬을 휘둘러댔다. 큰집의 그 맛엔 못 미치지만 이렇게 두 분의 소망을 이어가듯 짜장을 만들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남편과 함께 짜장 만찬을 앞에 두고 짧게 기도했다.
부디 모두에게 더 나은 내일이 되길...
그리고 지난 토요일 이른 새벽. 큰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정말로 큰 어르신이었고, 자상한 사람이었고, 엄청난 미남이었다. 일가친척에 객식구까지 다 먹여 살리고 자신들은 너무나 검소하게 생활했다. 신도각이 시간이 멈춘듯한 레트로 감성인 건 바로 그 검소함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그곳은 개점이래 무엇인가 변한 게 없다. 그저 깨끗이 씻고 닦고 시간과 함께 길들여졌을 뿐이다.
큰아버지의 임종을 준비하며 개점 50년을 향해가던 신도각도 이제 완전히 멈추고 말았다. 가족들에겐 너무 익숙한 공간이라 사진 하나 제대로 찍어 두질 못했다. 검색하다가 '쑤(sujeong8142)'님의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큰아버지와 신도각의 추모글을 올릴 때 쑤님의 사진을 사용해도 될지 여쭤보았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고맙습니다.)
사실 두 달 전 시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미처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 거대한 슬픔 하나를 또 마주한다.
자식을 위해, 이웃을 위해 아금박스럽게 자신을 활활 불태우고 떠나버린 어른들을 추모한다.
부디 아픔 없이 잠드시길, 평안하시길.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안녕히 가세요.
PHOTO by 쑤 https://blog.naver.com/sujeong8142/222175573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