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V피플 Apr 15. 2017

행복하기 이전에 떠올려야 할 것들.

무라카미 하루키와 버트런트 러셀의 메타포.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솔직히 무라카미 하루키를 빼놓고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2005년 하루키의 책에 심취하면서 국내에서 출판된 책을 읽어나가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일종의 따라잡기식 자전적 소설 '가끔은 빗속을 달려'를 썼다. 하루키 문체를 의도치 않게 지향한 습작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하루키의 책 중, '태엽감는 새'는 나에게 아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주인공은 고양이와 아내가 사라진 이후, 집 근처 우물에 들어가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세상과의 연결고리에 대해 생각한다. 그 중 잊혀지지 않은 부제가 있었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그 책에 있어, 1권의 '작은 삶 큰 의미'라는 것과 4권의 '사람은 누구나 태엽감는 새'라는 간략한 부제가 나의 마음을 계속 흔들어 놨다. 물론 지금까지도 글을 쓰는 중요한 메타포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 살면서 누구 하나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좋은 직장은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좋은 차는 남들이 사고 싶어하는 멋드러진 엠블렘의 비싼 차이고, 좋은 집은 남들이 선망하는 중심가의 시세 좋은 고층 아파트였다. 좋은 인간관계는 살면서 도움을 받을 것 같은 전문직을 갖거나 연예인과 친분이 있는 그 누군가였고, 좋은 삶이란 최대한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미 조차 불분명한, 아니 오히려 너무 확실해서 진짜 의미는 사라져 버린 '좋은 것들'을 최대한 손에 부여 잡고 사는 것'이었다. 한편, 누군가는 부모님이 바라는 인생을 살면 잘 사는 거라 생각하고, 누군가는 친구가 부러워 하면 멋지게 사는 거라 생각했다.




결국 자신의 삶은 없었다.



타인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이라 착각했다.

왜냐하면 사회적 통념이 그러한 생각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대다수는.



그리곤 시간이 흘러 서른 전 후가 되어, 누군가 나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 바로 그것이었다. 영국의 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 사회사상가로, 노벨문학상(1950년)을 수상한 인물이다. 화려한 경력을 떠나서, 그 책에 나에게 준 신선함은 문장의 수려함이 아니라 생각의 명쾌함이었다. '스스로 불행해 지는 원인을 극복하는 것과 일상의 소중함을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가는 행복의 위대함'을 역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남이 세운 행복의 기준'을 내가 성취하면,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착각'하지만, 그러한 평가대상의 주변인조차 사라지면 결국 공허해 지고 만다. 대중의 응원으로 스타덤에 오른 연예인이 인기가 쇠락한 뒤, 쓸쓸한 여생을 보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쓸쓸함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선,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이든, 지금 이 순간에 어떠한 위치에 있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포함한 자신의 하루하루를 자신의 신념 안에서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행복하지 않다고 한국사회를 탓하는 것 또한 핑계에 불과하다. 그러한 사람들은 북유럽의 살기 좋다는 국가에 가서도 결국 남을 의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어떤 국가에서 태어났던, 어떤 사회구성원으로 살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던, 지금 모은 유형의 자산이 얼마든, 작년의 업무 성과가 계획을 초과 달성하던지 말던지,,,


나의 인생은
'내 안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생관'과
오늘을 대하는 '일상의 룰'에 따라서
흘러간다는 점이다.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강박 속에 따라가는 길은, 결국 남 역시 불안해서 선택한 주변인의 시선에 맞춘 레시피적 성공은 한계가 있다. 내가 어떠한 처지가 되든, 나는 나일 수 밖에 없는 한계성 속에 피어나는 자기 긍정과, 일상에의 긍정. 하루키 식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삶일 지라도 누구나 개인은 하나의 독립적이고 큰 의미를 가진 존재이며, 스스로 감는 태엽으로 살아가야만 오늘의 움직임이 더욱 나다워진다는 것이다.



그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인 '행복의 의미'. 나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 웰빙(well-being)을 넘어 웰다잉(well-dying)까지 추구하는 사회적 재촉. 결국 어딘가 서글프고 강박에 사로잡힌 행복은 결국 허무할 뿐이다. 내가 지금 젊고 당당하게 좋은 직장을 갖고 열심히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던, 늙고 병들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노년의 시기이건, 결국 나라는 인간의 실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썼던 에세이 주요 화두가, '행복하지 말아요, 그냥', '개인문명' 등이었는 지도 모른다. 행복을 좇으려다가 결국 행복의 강박에 사로잡힐 바에야, 행복이란 어설픈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좀 더 나다운 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오늘 이 순간을 살면, 결국 그건 내가 아니고는 경험할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단순하지만 꽤나 묵직한 메타포.


나만 알다가 결국 인생의 노년이 될 지라도 스스로 가슴 벅찬 행복을 경험한다는 새로운 패러다임. 그리고 그 패러다임은 '행복해서가'아니라, '나답게 사는 개인문명'으로 인한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온다는 것.


이러한 생각과 시도는 꽤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 확실한 의미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지향점을 한국사회에 태어나 남과 다르게 설정하며 사는 인생은 분명 차이가 있다고 확신한다. 남들 보기에 그럴 듯한 '외연'을 확장하는 부풀리기식 '타인시선'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 오늘을 사는 원칙을 확보하고, 삶에서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며 즐거웠던 것들을 조용히 떠올리며 그 몇 가지를 붙잡고 되든 안 되든 실천해 보는 '오늘의 개인문명' 행복.


결국, 정답은 없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의 '삶에 대한 포지셔닝'이

스스로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결정하는데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걸 믿고 스스로 살아보자. 하나하나씩 잊혀진 자신의 메타포를 기억해내고 삶에서 그것과 가장 연결고리가 있는 무언가에 몰입해보자. 즐거웠던 삶의 주도적 호흡을 다시 시작해보자.


행복해지기 이전일지라도..
바로 오늘.





(이미지 출처: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 새' 및 버트런트 러셀 '행복의 정복' cover page/ 이노우에 다케히코 '리얼', '슬램덩크' 캡쳐/ pin.it/uwucF84)

이전 04화 일요일 오후만 되면 움추린 당신, 언제쯤이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