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종적, 횡적 행보’에 관한 단상
우리는 큰 의미에서 시간에 의존한 삶을 살고 있다. 어제가 가고 오늘이 오는 일상의 흘러감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이루어 가고 있는가? 이룬 것들에 대한 상념과 자기심취로 인해 하루 중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가?
하루키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우연성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은 명확하게 일어나 버린 일이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아직 명확하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배후의 ‘모든 것’과 눈 앞의 ‘제로’ 사이에 끼인 순간적인 존재고, 거기에는 우연도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다.”
첫 번째. 일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하루하루 쌓아가며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다만, 이미 일어난 일은 오늘 내가 하는 일과 연관성을 가질 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독립된 사건이란 말이다. 그러니 과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앞으로 일어날 일 중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에 대한 우려로 인해, 많은 걱정을 하고 또한 그 일을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쓴다. 가능성을 애써 몇 %로 규정지으며 하루하루 걱정만 가득한 삶을 산다. 무언가 또 쌓아가고 싶은 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는 삶은 ‘종적 행보’에 관한 삶의 모습이다. 아무리 지금에 집중한다고 해도 과거에 쌓은 그럴 듯한 성과와 앞으로 이어질 참신한 해피엔딩에 집착하게 되면 매일 같이 무언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야만 하며 그래야만 내일이 이어진다는 묘한 아이러니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러다 무언가 결정적인 원인이나 실수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경험하면 겉잡을 수 없이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바오밥 나무 하나를 두고 평생을 줄달음질 하며 올라가는 형국이다.
우린 종적 행보에 많은 에너지를 쏟다 보니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특정 목적을 지향하게 되고, 권력을 지향하기 쉽다.
느리게 사는 삶은 이와는 반대되는 삶의 자세로서 ‘횡적행보’라 할 수 있다. 삶의 템포를 한 단계 느리게 한다는 것은 실제로 뉘엇뉘엇 해가 지듯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빠르게 사는 삶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삶의 다양성에 집중하는 것이고, 작은 삶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 곱씹어가며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린 회사에 다니며 일을 한다. 종적횡보에 집착하는 사람은 늘 무언가 쫓기듯이 일을 한다. 회사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기 때문이다. A에게 보고할 일, B에게 설명해야 할 일, C 시스템에 등록해야 할 일, D 업체를 만나러 갈 일 등으로 머릿속은 늘 복잡하고, 여러 가지 벽돌을 늘 머리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아랫 쪽에 박힌 돌을 밀어내면 또 다른 벽돌이 윗 쪽에서 머리를 누른다. 늘 머리가 무겁기만 하고, 마음이 급하다 보니 단순한 사고로 문제를 처리한다. 얄팍해진 일처리로 인해 또 다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새로운 과제가 늘어간다. 하루하루 한 숨만 나온다.
종적행보의 가장 큰 단점은, 삶이 바쁘지 않아도 숨이 찬다는 데에 있다.
횡적 행보에 집중하면, 오늘 꼭 마감해야 할 일이 아니면 자신만의 FLOW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하루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가능할까 하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오늘 내에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평소에 관심 있었던 것들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삶의 발자취에 집중할 수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삶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경쾌한 리듬이 있다.
하루키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사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지만, 그런 건 내가 내 재량으로 이끌어 나가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힘겨운 삶에 대해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얼마나 명쾌한 삶의 자세인가? 삶 자체의 만만치 않음에 대해선 인정하고 있다. 절대 가볍게 살지 않는다. 단, 나의 재량은 어느 정도 선을 넘기 어렵다. 그 숙명적 한계를 인정하고, 조용히 내 삶을 소중히 붙잡고 나아가면, 조급해 지지 않는다. 힘겨운 삶이란 원래부터 있지 않았다.
남이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본인이 결과에 대한 선택지를 줄여가고, 완벽주의란 미명하에 스스로 달달 볶는 하루하루를 살기 때문에 늘 힘겹기만 하다. 주말이 되면 편안할 것 같지만, 그리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주말을 바라보며 한 주를 살 필요가 없다. 주말이 된다고 엄청나게 즐겁지 않은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주말을 과도하게 기다리는 자세는 평일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종적행보만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횡적행보에 집중하게 되면, 아무리 바쁜 시기라도 바쁘다고 느끼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할 것은 어차피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정해져 있으며, 그냥 순수하고 차분하게 리듬을 타며 몰입을 하는 것이다. 일의 속도에 관해선 집중도를 좀 더 차분히 높이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되지 않은 일에 대해선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평가하는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억지로 봉합을 하듯이 일을 해서 얼마나 행복한가
?
또한, 하루키는 ‘태엽감는 새’에서 이런 구절을 남긴다.
“특별히 마음을 닫고 있겠다는 생각은 없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나 자신도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이야.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되도록 공평하게 파악하고 싶거든.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현실적이 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
빨리 결론을 내리고, 완결성을 갖는 무언가를 하다 보면, 어느 샌가 살아가면서 마음은 닫히고 피상적인 일이 연속 되고, 그럴 듯한 보고를 위해 과장하게 되며, 점점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갈 뿐이다.
남의 평가는 좋아질 지 모르나, 마음은 공허해 진다.
시간이 걸려도 좋다. 어차피 우린 삶 속에서 한정된 선택을 하며 한정된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 숙명과도 같은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면, 역설적으로 오히려 한계와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된다. 내가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따라 그리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행보는 ‘횡적’일 필요가 있다. 굳이 다른 표현을 쓰다면 여러 군데 방점을 찍어가며 사뿐한 산책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가 보란 얘기다.
어쩌면 종적행보의 결과물은 횡적행보에 비해 그리 대단한 것이 없을 지도 모른다. 5년 정도 일의 정년이 늘어나고, 한 단계 더 승진하며, 몇 억 정도 더 벌었을 지도 모른다. 주변의 박수소리를 조금 더 커졌을 지 모르고, 몇 십명 정도 나를 찾는 사람이 늘어난 인생을 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고백을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불명확하게 되는 거지. 자기에 대한 연민, 타인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연민, 자기에 대한 분노, 그러한 것들의 경계선이 불분명하게 되는 거야. (중략) 결국 감정에 관한 모든 것들을 다 모르게 되는 거야. 회전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구분이 불명확해져서 결국에는 혼돈에 이르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