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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단상 5] AI 시대의 창작자 정체성

기계와 경쟁하지 않는 방법

by 여철기 글쓰기

요즘 글을 쓰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문장, AI(인공지능)가 더 빠르고 잘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처음 생성형 AI를 접했을 때, 저는 신기함에 웃었습니다.
몇 초 만에 보고서 초안이 나오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습니다.
그 놀라움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곧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속도, 완결성, 심지어 표현까지…
AI는 이미 인간 작가의 영역을 깊이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경쟁의 무의미함을 깨닫다


한동안 저는 AI를 ‘경쟁자’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AI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게임판에서 제가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AI는 수십억 개의 문장을 학습했고, 한순간에 결과물을 만들어 냅니다.
속도와 양에서 인간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AI와 경쟁하지 않기로.
대신, 함께 쓰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기계가 가질 수 없는 것


AI에게는 삶이 없습니다.
따뜻한 커피잔이 손에 닿을 때의 온기,
첫사랑의 서툰 미소,
오랜 준비 끝에 얻은 성공의 울컥함.

이 감각과 기억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데이터로는 복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썼습니다.
AI가 저에게 ‘마음을 꺼낼 수 있는 공간’을 준다고.
그러나 그 공간에 채워지는 것은, 결국 저만의 이야기와 감정입니다.
AI가 아무리 많은 연애 소설을 학습해도
첫 데이트의 설렘이나 이별의 울림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창작의 주도권을 지키는 일


AI는 훌륭한 생산자입니다.
하지만 기획자와 감독의 역할은 여전히 인간의 몫입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글을 써줘.”
이렇게 말하면 AI는 클리셰를 섞어 그럴듯한 글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요청하면 어떨까요?
“비 오는 날 카페에서 헤어진 연인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함께 듣던 노래를 배경으로,
감정은 최대한 절제하고,
빗소리와 커피 향으로만 슬픔을 표현해 주세요.”

이것은 AI가 먼저 상상하지 못합니다.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방향 설정,
그것이 창작자의 몫입니다.


‘왜’ 쓰는가


AI는 무엇을(What), 어떻게(How) 쓸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왜(Why) 쓰는지는 모릅니다.

왜 저는 이 글을 쓰는가?
왜 이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은가?
그 글로 누구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가?

이 ‘왜’가 빠진 글은, 아무리 매끄러워도 공허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공생의 시대


AI는 제 자리를 빼앗으러 온 존재가 아닙니다.
저에게 보지 못한 길을 보여주고,
제 생각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어주는 동반자입니다.

덕분에 저는 더 이상 백지 앞에서 머리를 싸매지 않습니다.
대신, 제 경험을 돌아보고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꺼낼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계의 속도는 부럽습니다.

그러나 창작의 빛은 속도가 아니라,
사람의 진심에서 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AI와 경쟁하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씁니다.
그리고 저만이 쓸 수 있는,
조금 느리지만 깊이 있는 문장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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