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도 타인의 중심은 훤히 보였기에 그들의 말투 뒤에 숨은 짙은 질투를 모른척 하는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그가 선생님을 기억해낸건 아주 의외의 상황에서였다.
오랜만에 어머니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떤 여정을 거친 건지 귀퉁이가 접히다 구겨진 연두색 편지봉투를 바라보며 치호는 무심하게 서있었다. 그 얼굴엔 표정이 없었고, 누가 볼까 작게 써놓은 글씨는 '치호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싫어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싫어했다. 아버지는 큰손인 할아버지의 피를 뼛속까지 이어받은 이성적 존재의 표본체였다. 성정이 여렸다던 아버지의 어린시절을 치호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둘 사이에 어떤 난관과 로맨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이란 것이 회고될 수 있는 시점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명확한 남이었다. 같은 집안에 있으면서 서로의 발소리를 듣기 싫어하고 눈 마주치는 걸 껄끄러워하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주로 승자-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다-는 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버티고 있는 대저택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고 있었고,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두려워했다.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이자 사랑을 주는 존재인 이치호는 애석하게도 한명이었고 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치호를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에 진 건 어머니였다. 기댈 곳 없는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기댄 것이 나쁜 일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게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은 조금 충격이지만, 그때 이치호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는 여자를 때리는 비신사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때리는 건 가능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어??"
어머니의 외도를 알아챈 아버지는 그 시각 이후 '이치호의 모친'이라는 최소한의 대우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미쳐 발광한' 어머니가 온 집안의 물건을 던지고 깨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다가 본의 아니게 깬 접시의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는 치호의 팔뚝을 보고 겨우 잠잠해졌다고 한다. 다쳤다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을 바라보았던 어머니의 생생한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이후로도 여러 번의 다툼이 있었다. 그건 치호가 열 살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없었다. 마지막 인사는커녕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는 이 주일을 내리 울었다. 눈이 퉁퉁 붓고 목소리는 쉬었다. 아버지는 그를 달래주었지만 어머니가 돌아올 거다. 아무 일도 아니다. 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는 끝끝내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이주가 지났을 때, 그는 너무 힘들어 우는 것을 멈췄다.
그래서 마지막 기억은 시린 눈과 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구멍이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더 이상 이렇게 오래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조금 더 머리가 컸을 때, 어머니한테서 편지가 도착했다. 아버지는 버릴 요양이었던 모양이지만 삐죽이 튀어나온 연두색 봉투를 그가 발견했다. 발신지로 추정되는 주소지는 알파벳으로 이뤄져있었다. 어머니가 외국으로 갔구나.
그때부터 대략 2년 반 동안 그는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로의 일상과 안부를 묻고, 그리워했다. 본의 아니게 어머니와 그는 견우직녀같은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2년 동안 서서히 그의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멀어졌다.
어딘지 모르게 쫓겨나듯이 집을 나갔고,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보러 오지 못하는 비운의 어머니. 어머니와의 편지가 지속되면서 그건 일종의 서운함으로 그 이름을 달리했다.
내가 이렇게 커가는 동안 어머니가 곁에 없었다는 지독하리만치 또렷한 사실. 그 사실의 그를 내몰았다. 아들을 그리워하기는 할런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삐뚤어진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정말 그러지 않을까? 그렇게 정처 없는 분노가 내면에서 소리 없이 올라오다가, 어느 순간 귀찮아졌다.
그가 학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매해 겪는 여러 이벤트를 시간 속에 쌓고 다시 졸업을 하기까지.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는 시기에 그의 곁엔 어머니가 없었다. 다정하다기 보단 엄격했지만 그를 먹이고 입히고 재운 건 아버지와 할아버지였다. 편지만 오고가는 어머니의 허술한 부재가 되려 곁에 있는 가족의 생생함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된 셈이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흐부끼던 그의 마음은 고요를 찾았다. 나도 참 냉정하고 싸가지가 없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답장을 하지 않은 편지 이후로 반 년만이었다. 아니 반년이 더 되었나? 그는 편지를 열어볼 마음이 도통 들지 않았다. 다시 어머니의 편지를 읽게 된다면, 그 절절한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나름대로 다 잡은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푹. 지익.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행동이 앞섰다. 딱히 새로운 내용이 없는 편지였다. 다 읽고난 뒤 찢어버리고나서도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버려지는 편지를 보다 그는 문득 떠올렸다. 자신이 선생님이라 부르던 한 여성을.
머리에서 번개가 쳤다.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얼핏 그냥 넘기려던 생각의 꽁무니를 힘껏 움켜쥐었을 때 그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책상 뒤편 후미진 구석에서 그 물건을 발견했다. 유일하게 남은 그녀의 유품이었다. 왜 이게 버려지듯 그 속에 고요히 잠들어있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왜 그녀는 내게 시계를 준걸까.
그리고 왜 난 그녀를 잊고 있었을까.
기억을 썰어낸 것처럼 깔끔하게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 조각을 찾아다 맞춘 것처럼 훅, 하고 올라왔다.
‘미안해’
그리고 옆에 누군가 서 있었다. 시계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물끄러미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환영을 마주했다.
거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다시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