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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진 Jul 02. 2020

매주 화요일 적당한 양의 물과 잎 위에 입

내가 어렸을 때 아빠 곁엔 늘 여러 모양의 식물이 있었다. 아빠는 매일 아파트 베란다 가득 놓인 난의 잎을 하나하나 닦고, 제때를 알아채 분갈이를 하고, 꽃이 피면 그 사실을 나와 동생에게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실에는 낮고 넓은 화분에 사는 키 작은 나무들이 여럿 있었다. 나와 동생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작은 소나무 한 그루에 장식을 걸고 불빛을 달았다. 만화에서 보던 트리가 풍성한 잎 사이로 화려한 장식을 가득 달고 있다면, 우리의 소나무 트리는 외투 없이 알록달록한 스카프 몇 장을 두르고 멀뚱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겨울 내내 거실 한구석에서 빛을 발하는 소나무가 나는 퍽 마음에 들었다. 봄이면 또 다른 나무에 진분홍색 철쭉이 피었고, 어제까지 없던 새로운 색의 등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아침 뉴스였다.


집안 형편이 힘들던 몇 년이 흐르고 보니, 아빠의 난과 분재는 사라지고 없었다. 매일매일 그 식물들을 돌보느라 분주했던 아빠의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여전히 알지는 못 한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아빠와 엄마는 다시 넉넉한 베란다가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서울에서 생활하다 부모님을 보러 간 새집에는, 엄마의 다육이가 가득했다. 엄마는 언제부터 이렇게 식물을 좋아했을까? 우리를 기르느라 바빴던 엄마는, 이제 다육이를 기르느라 바빴다. 다육이들은 아주 작고 귀여웠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큰 세계를 오밀조밀 이루고 있었다. 난 언제고 고향집에 갈 때마다 엄마의 정원을 만나는 일을 기대하게 되었다. “이쁘지, 여기 이렇게 작은 꽃이 피었다.” 화분들 주변을 서성이고 있으면 엄마로부터 최근 다육이들에게 있었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사는 서울 집에도 식물 하나가 있다. 작년 집들이 선물로 받은 이 식물의 종류는 '행운목'이다. 당시 종영한 지 한참이나 된 드라마 ‘비밀의 숲’에 빠져있던 나는 그날로 이름을 ‘(행)운목이’라고 지어줬다. 황시목이- 시목이- 하던 이름과 어감이 비슷한 게 재미있었다. 운목이는 우리 집으로 이사 온 첫날 아주 큰 사건 하나를 겪게 된다.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 식물이라면 무조건 뜯어먹고 보는 망고(고양이)에게 모든 잎을 뜯겨버린 거다. 그러나 매일매일 달라진 모습이 보일 정도로 운목이는 씩씩하게 자라났고, 뜯겨서 노오랗게 말랐던 가장자리가 차츰 초록으로 회복되었다. 내가 운목이에게 해준 것은 얼마 없었다. 매주 화요일마다 적당한 양의 물을 주는 일,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물을 주기 전 소리 내어 건네는 인사와 물을 준 후엔 반질한 잎 위에 입을 한 번 맞추는 일. 어렸을 때 학교에 각자의 화분을 가져오라고 하면, 내 화분은 늘 일찍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다. 분명 꽃집 주인이 일러준 대로 일주일에 한 번, 적당한 양의 물을 줬는데 말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식물을 곁에 두는 일은 늘 망설였는데, 운목이는 나에게 눈에 보이는 작은 자신감의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마음이 먹먹하다. 그런데 운목이는 내 마음대로 자라지 않아 좋다. 나는 나의 방식대로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는 그의 방식대로 큰다.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난을 닦고,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다육이를 보았을까. 그 난과 다육이는 어떤 마음으로 꽃을 피웠을까. 이번 봄에 집에 내려갈 땐 아빠의 식물과 엄마의 식물을 하나씩 안고 내려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저나 운목이는 식물을 워낙 거친 방식으로 좋아하는 망고 덕에 화장실에서 바깥으로 높이 난 창가에서 살고 있다. 뿌리보다 조금 넓은 방에서 자기보다 조금 큰 네모난 창을 지붕 삼아. 이제 그는 집보다도 훌쩍 더 커가는데, 어디에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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