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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진 Oct 07. 2021

혼자서도 커피 한 잔을 다 마실 수 있겠다

커피에 취약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지난 회사에서였다. 어느 날은 마지막 한 모금까지 호로록 비우고 자리를 뜨는 여유를 부려보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바쁘게 테이크 아웃 잔을 쥐고 사무실로 가는 언덕을 올랐다. 한숨 돌리고 일에 집중해 볼까 싶은 두 시 무렵부터 카페인은 빠르게 몸 구석구석 퍼졌다. 카페인의 힘을 빌어 일을 지속하려던 기대는 어긋났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까지, 세포 하나하나가 알알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세포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려 한다는 거였다. 엉덩이가 근질근질하다는 감각도 그때 느꼈다. 분명 등이 가려웠는데 손을 뻗어 그 부위를 긁어도 간지러웠다. 나는 발가락을 오므리며 힘을 꼭 줘도 보고, 엉덩이를 자꾸만 씰룩거렸다.


식은땀이 많은 사람이 된 것도 그때부터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 덜컥, 드라이아이스와 함께 포장된 아이스크림처럼 이마가 차게 식었다. 덥지 않은데 땀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었다. 이렇게 하면 왜 저렇게 하지 않았어, 저렇게 하면 왜 이렇게 하지 않았어 하는 식의 얘기를 자주 들었다. 질문에 답하는 일은 토를 다는 일, 핑계나 거짓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땀이 흐르며 이마가 식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냥 여기서 쓰러져 버리면 좋겠다는 상상을 자주 할 무렵 그곳을 나왔다.


그 뒤로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됐다. 커피를 마시면 온몸이 근질거려서일까?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매던 날이 떠올라서일까? 아니면 커피를 여러 잔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관계가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일까. 어쨌든 커피 한 잔을 손에 든 기분을 까먹은 지 오래다.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은 이유는, 오랜만에 커피 한 잔을 다 마신 날이 오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른) 일터에서 퇴근을 하고, 궁금했던 카페에 갔다. 달달한 맛이 필요해 크림 모카를 주문했다. 카페 모카였을 수도 있다. 적당한 온도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으 달다. 질려버리지는 않을 정도로 단데 씁쓸한 맛도 품고 있어 좋네. 흡족해하며 요즘 들고 다니는 책을 폈다. 글자를 따라가는 내내 손발이 근질거리지 않았다. 엉덩이가 들썩이지 않았다. 멈추고 싶은 문장 앞에서 가만히 멈출 수도 있었다.


마침 커피를 마신 곳의 다른 부분들이 충분히 마음을 놓게 한 것도 있겠지. 카페 문을 열기 전 사장님과 눈을 마주쳤는데 '아, 들어오시는군요'라는 듯 눈짓 인사를 건네셔서 순식간에 아이스 브레이킹이 되어 버렸다. 놀란 한편 작은 환대를 받은 기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공간이었고, 맨 안쪽 자리가 비어있다는 점도 좋았다. 나는 가능하면 안쪽일수록, 기댈 벽이 있을수록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므로.. 또 이곳의 음악이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진짜 좋았기 때문이다. 엘피를 틀어주는 곳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곡과 곡 사이에 충분한 고요가 있다는 거다.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의 정적과도 닮았다. 마음을 맡길 준비를 하는 시간. 내 자리에선 엘피 더미 뒤에 앉은 사장님이 안 보인다는 점도 좋았다. 나오는 음악이 말처럼 들렸으므로. 가끔씩 케이스에서 엘피 판을 꺼내는 비닐봉지 소리가 났고, 사탕을 까먹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떠날 시각을 헤아리지 않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누구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생각은 가고 싶은 만큼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어딘가에 앉아 쉬는  이런 거였지. 커피  잔을 마시는 일은  이런 거였지. 어쩌면 커피와 다시 친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는 이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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