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0장. 이름 없는 것들의 경이, ‘물고기’라는 환상

3부. 심연의 가르침, 존재의 재발견

by 조하나


우리는 종종 ‘앎’이라는 미명 아래, 눈앞의 세계를 너무 쉽게 재단하고 분류한다.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태초부터 ‘이름’이라는 주술적 힘을 빌려왔다. 이름은 대상을 규정하고, 개념의 틀 안에 가두며, 마침내 우리 머릿속에 질서를 부여한다. 서울의 고밀도 주거지에서, 혹은 화려했지만 덧없었던 잡지사의 에디터 생활 속에서 나는 온통 이름 지어진 것들, 이미 정의된 개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 자신이 부여받은 직함, 내가 살던 집의 동 호수, 내가 입었던 옷의 브랜드명, 이 모든 것이 나를 규정하고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전부인 양 느껴졌다. 직접 보지 않아도, 겪지 않아도, 책이나 영화, 온라인 세계를 통해 이미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안다고 믿어야만 했다. 누군가와의 비교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혹은 스스로의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앎’이라는 갑옷을 걸쳤던 것이다.


하지만 물속으로 처음 들어선 순간, 그 갑옷은 산산이 부서졌다. 수중 세계는 내가 발 딛고 선 지상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그곳은 인간의 언어가 미처 닿지 않는, 개념의 울타리로는 포착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곳에는 인류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당연히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심해어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빛 한 줄기 없는 심연 속에서, 그들은 인간의 시선과 무관하게 오직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묵묵히 증명하고 있었다.



Whisk_1b74376375.jpg




나는 ‘해마’를 좋아한다. ‘물속에 사는 말’이라는 그 이름은 얼마나 기이한가. 육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말’이라는 이름에서 떠올리는 것은 힘찬 질주, 갈기 휘날리는 역동성, 드넓은 초원이다. 하지만 바닷속의 해마는 어떤가. 그들은 중력을 거스르듯 우아하게 부유하고, 해초에 꼬리를 감고 고요히 정지해 있다. 수컷이 새끼를 품는다는 경이로운 번식 방식까지, 해마는 ‘말’이라는 이름이 가진 모든 고정관념을 전복시킨다. 이처럼 이름은 때때로 대상의 본질을 가리거나 왜곡하는 장막이 될 수 있음을 해마는 소리 없이 일러준다. 룰루 밀러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물고기’라는 분류가 가진 환상을 벗겨냈듯이, 나는 해마를 통해 이름이 지닌 역설적인 힘과 한계를 동시에 목도한다.


물속에서 나는 수많은 생명체와 마주쳤다. 어떤 이들은 내가 어렴풋이 아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내가 미처 이름 짓지도 못했지만, 분명히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지식이나 분류 체계에 순순히 편입되지 않았다. 그저 ‘있다’라는 순수한 실재감으로 나를 압도했고, 겸허하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으니 없다’고 부정하거나 아예 알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깊이 인지하게 되었다. 이는 결코 오만함이나 특별한 지식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작은 시야와 편견을 벗어나 무한한 존재의 스펙트럼을 깨닫게 된, 지극히 겸손하고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발밑의 세계’는 ‘보이는 것’과 ‘남에게 인정받는 것’만이 전부라 믿었던 나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가르쳐 주었다.



Whisk_73fe6f6bd1.jpg



하지만 이 경이로운 깨달음의 이면에는 깊은 외로움이 자리했다. 그 존재들의 생생한 실재를 증명하는 것은 오직 나의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 신비로운 존재의 증명을 아는 이는 사라지고, 그들의 존재는 다시금 ‘없는 것’처럼 되어버릴 것이다. 나 혼자만 품고 있는 이 경외로운 비밀이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의 오묘한 조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때로 고독한 책임감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인류가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부여하려 애썼던 것도, 이처럼 이름 없는 것들이 사라질까 두려워했던 원초적인 불안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동양 철학의 무명(無名) 사상을 떠올린다. 노자가 “도는 도라 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이름 지을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했듯, 진정한 진리는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 존재한다. 물속에서 마주한 고요와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를 넘어선다. 그것은 온갖 이름과 개념으로 뒤덮인 지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언어 이전의 세계로 회귀하는 경험이었다.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비로소 이름 없는 존재들의 본질적인 실재가 명료하게 다가왔고, 고정관념에 갇히지 않은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빛 한 줄기 없는 심연 속에서, 상상조차 불가능한 압력과 극한의 환경을 견디며 살아가는 심해 생명체들의 기상천외한 생존 전략은 어떤가. 그들은 우리의 획일적인 ‘성공’이나 ‘생존’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경이로운 다양성과 적응력을 보여준다. 이들 이름 없는 존재들의 삶은 도시의 경쟁적이고 단일한 삶의 방식에 지친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무한한 방식이 존재하며, 각자의 고유한 삶의 방식 자체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Whisk_08bf5e8057.jpg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깊은 겸손함을 배웠다. 내가 세상에 대해 ‘안다’고 자부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와의 비교 우위에 서기 위해, 혹은 스스로 뒤처지지 않는다고 느끼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며낸 허상이었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도시의 삶이 강요했던 피상적인 ‘앎’의 강박에서 벗어나,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을 되찾았다.


심해의 이름 없는 존재들, 그리고 해마처럼 이름이 지어졌음에도 우리의 편견을 깨뜨리는 존재들은 내게 세상의 오묘한 조화를 가르쳐주었다.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기준에 의해 정의되는 ‘나’가 아니라, 거대한 자연의 질서와 경이로운 생명의 순환 속에 편입된 하나의 미미한 존재로서 나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발 밑의 세계’는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과 끝없는 호기심을 선사했다. 모든 생명체와 물질을 대하는 겸손하고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정직함.


그리고 이 깨달음, 이 외로움은 나를 다시 글을 쓰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내가 경험하고 인지한 ‘이름 없는 것들의 경이’를 세상에 전하는 일. 다른 이들이 미처 보지 못했거나 부정하는 존재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 내가 품은 이 고독한 비밀이, 나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속에 가닿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의 ‘앎’은 ‘함께 아는 앎’으로 확장되고, 서로의 존재를 통해 이름 없는 것들의 경이를 함께 증명하는 연대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당신의 발밑에서 배운 지혜는 결국,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의 시선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완성해 나간다는 삶의 본질이었다.







04_메일.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