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속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서는 것은, 단순히 공간을 이동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지층을 향한 다이빙이자, 인간의 시계로는 감히 측정할 수 없는 영겁의 연대기 속으로 나 자신을 던지는 일에 가까웠다. 수중 라이트 빛이 물의 막을 뚫고 동굴의 벽을 비추는 순간, 나는 거대한 도서관의 서고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다만 그곳에는 종이로 제본된 책 대신, 수억 년의 세월이 압축된 돌의 연대기가 꽂혀 있었다.
벽면을 쓰다듬는 손끝으로, 혹은 마스크 너머 응시하는 눈으로 읽어낸 것은 문자가 아니었다. 미세한 퇴적층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섬세한 무늬,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십만 년에 걸쳐 빚어낸 종유석의 장엄한 기둥, 바닥에서 솟아올라 그 기둥과 만나려는 석순의 더딘 의지. 그것들은 지구라는 행성이 스스로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였다. 인류가 나타나 역사를 명명하고 문자를 발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서는 이미 시간이 물질로 변환되는 성스러운 의식이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턴(James Hutton)은 인간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지구의 나이를 ‘깊은 시간(Deep Time)’이라 명명했다. 그는 암석의 생성과 침식, 퇴적의 순환을 관찰하며 성서에 기반한 수천 년의 지구 역사가 얼마나 편협한 상상력의 산물인지를 간파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장구한 서사였다. 세노테의 동굴 벽이야말로 허턴이 말한 ‘깊은 시간’의 가장 완벽한 전시장이다. 1센티미터의 종유석이 자라나는 데 평균 100년이 걸린다는 과학적 설명을 떠올려본다. 내 눈앞의 거대한 석회암 기둥들은 몇 만년, 혹은 몇 십만 년의 세월을 오롯이 품고 서 있는 시간의 화석이다.
이 거대한 시간의 기념비 앞에서, 지상에서 나를 그토록 옥죄던 욕망과 불안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어제의 실패, 내일의 걱정,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얻거나 잃었던 자존감, 그 모든 것이 이 영겁의 시간 앞에서는 얼마나 하찮고 찰나적인 것인가. 서울의 아파트값을 걱정하고, 승진에 목매고, SNS의 ‘좋아요’ 숫자에 일희일비하던 나의 모습은 마치 현미경으로나 들여다보아야 할 미생물의 분주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패배주의적 허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장엄한 시간의 스케일 앞에서 얻는 기이한 해방감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기억이 단지 개인의 뇌리에 저장된 과거의 파편이 아니라, 공동체의 서사와 역사를 통해 구성되고 전승되는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이 동굴의 벽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이곳에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왕조의 흥망이나 전쟁의 역사는 없다. 대신, 훨씬 더 근원적이고 거대한 ‘행성적 기억’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 동굴의 벽면은 수억 년 전, 하나의 거대한 몸으로 붙어 있던 대륙, 판게아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 벽은 저 바다 건너 아프리카나 유럽의 어느 동굴 벽과 한때는 등을 맞대고 있었을지 모른다.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던 몸이 거대한 힘에 의해 찢겨져 나가고, 수억 년에 걸쳐 서로에게서 멀어진 이별의 상처와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수중 라이트 빛 아래 드러난 단층의 거친 표면은 그 장구한 분리의 고통을 증언하는 듯하다. 지각판의 충돌과 해수면의 상승, 그리고 이 거대한 이산(離散)의 역사야말로 인간이라는 종(種)의 기억을 초월하는 ‘깊은 기억’의 본질이다.
이러한 조우는 나라는 존재를 개인의 서사를 넘어 지구의 서사 안에 위치시키는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나는 단지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개체 ‘나’가 아니라, 분리되었으되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지구의 기억, 그 최말단에 잠시 접속된 하나의 의식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도시의 콘크리트 벽에 갇혀 서로 단절되어 있다고 느낄 때, 발밑의 땅은 한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던 원초적 통일성의 기억을 품고 우리를 지탱하고 있었다.
동굴의 벽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 어떤 웅변보다도 깊고 무거운 진실을 들려준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우리의 욕망은 덧없으며,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 역시 이 거대한 시간 앞에서는 한순간의 모래성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그러나 바로 그 찰나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임을 동시에 속삭인다. 영겁의 시간을 배경으로 하기에, 우리의 짧은 생과 그 안에서 나누는 사랑,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기쁨은 더욱 선명한 빛을 발한다. 돌 속에 잠든 영겁의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찰나로서의 삶을 온전히 긍정할 용기를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발밑의 세계는 그렇게, 덧없음의 자각을 통해 삶의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