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여름은 아스팔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에서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계절이다. 카페의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채 밖을 내다보면, 수많은 익명의 얼굴들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누구도 함께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현기증 나는 밀도 속에서 각자의 고독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 역시 그 풍경의 일부였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 모습을 강박적으로 의식하고, 잡지 속 광고처럼 완벽하게 연출된 삶을 갈망하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또 다른 욕망으로 잠재우던 시절. 서울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지만, 실은 가장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는 것은 그 모든 소음과 강박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세노테, 그 태곳적 침묵 속으로 들어설 때 나는 비로소 다른 종류의 연결을 감각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단지 고요한 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태초의 어둠 속에서 생명의 씨앗을 틔운 미생물부터 시작되는, 장구한 진화의 연대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나의 세포가 다른 세포를 품어 안으며 공생의 역사를 시작했고,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단 생명체들이 물의 세계를 채웠으며, 마침내 그중 일부가 뭍으로 올라와 우리 인간으로 이어졌다는 아득한 서사. 내가 뱉은 이산화탄소를 수중 식물이 양분으로 삼고, 나의 체온이 주변의 미생물을 깨우는 그곳에서, 나는 내가 그 장대한 그물망의 끝에 연결된 하나의 존재임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이 경이로운 그물망은 완벽한 순환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플랑크톤이 빛을 양분으로 바꾸면 작은 갑각류가 그것을 먹고, 물고기는 다시 그 갑각류를 먹으며 생명을 이어간다. 거대한 포식자조차 죽어서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다시 가장 작은 생명들의 양분이 된다.
그 순환의 가장 장엄한 정점은 아마도 한 마리 고래의 죽음일 것이다. ‘고래 낙하(Whale Fall)’라 불리는 현상 속에서, 수명을 다한 고래의 거대한 사체가 빛 한 줌 없는 심해의 바닥으로 가라앉으면,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가 되어 수십 년간 새로운 생명의 오아시스를 만들어낸다. 그곳엔 낭비도, 쓰레기도 없다. 모든 죽음은 새로운 우주의 시작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그것을 기꺼이 갚으며 살아간다. ‘공존’과 ‘상호의존’은 교과서 속의 단어가 아니라, 지구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신성한 법칙이다.
그 평화롭던 풍경 속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다이빙을 하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균열을 보기 시작했다. 이 붕괴는 생태계의 위와 아래, 그리고 그 기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수십년째 뉴스와 신문, 잡지로 듣던 이야기였지만, 깊은 바닷속에서 직접 경험한 위기는 두렵고, 참혹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먼저 나는 그물망의 가장 꼭대기가 인간의 탐욕에 의해 무참히 잘려나가는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해파리로 착각한 비닐봉지를 가득 삼킨 채 해변으로 밀려온 어린 거북의 텅 빈 눈을 보았을 때, 나는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인간과 거북이는 먹이 사슬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인간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으로 바다거북을 죽이면, 의도했든 안 했든 생태계는 뒤틀리기 시작한다. 정력과 원기회복에 좋다는 샥스핀 요리와 스쿠알렌 때문에 불법 대량 상업 포획으로 상어의 씨가 마른 바다에서는 천적을 잃은 하위 어종들이 비정상적으로 번성하며 오랜 균형을 무너뜨린다. 거대한 고래의 배는 우리가 버린 폐어망과 플라스틱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동시에 나는 생명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마저 불타오르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한때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산호초 군락이, 이제는 모든 색을 잃고 유령의 도시처럼 하얗게 스러져가는 그 침묵의 풍경 앞에 섰을 때, 나는 숲 전체가 불타버린 재난 현장에 있는 듯한 참담함을 느꼈다. 바다의 숲이 죽자, 그곳에 깃들어 살던 수많은 생명들은 해가 갈수록 거짓말처럼 눈에 띄게 줄었다. 이제 곧 우리, 인간 차례다. 얼마 안 남았다.
도시는, 그리고 도시를 채운 지적이고 힙하고 쿨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환경주의자’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유행하는 브랜드의 텀블러를 손에 들고 있지만, 그들의 대화는 온통 다음 해외여행과 새로 살 자동차, 옷, 신발, 가방 등에 대한 것이었다. 환경을 생각한다는 에코백은 이제 지구를 가득 채운 골치 아픈 패션 의류 폐기물이 됐다. 그들은 종이 빨대를 쓰며 환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안도하지만, 정작 그 음료가 담긴 플라스틱 컵, 그 원두를 실어 나른 비행기의 탄소 발자국, 카페의 냉방을 위해 가동되는 발전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작은 선행의 상징들이 더 큰 욕망과 파괴의 시스템을 가리기 위한 알리바이가 될 수 있다는 건 헤아리지 않는다. 수면 아래 세계의 준엄한 진실과, 수면 위 세계의 이 가벼운 자기기만 사이에서 나는 길을 잃은 이방인처럼 홀로 앉아 있었다.
결국 그물망의 어느 한쪽을 잡아당기면, 다른 모든 곳이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내가 버린 것이 돌고 돌아 결국 나의 식탁으로, 나의 몸으로 돌아온다는 냉정한 진실 앞에서 ‘나만은 괜찮을 것’이라는 도시의 믿음은 무력한 환상일 뿐이다. 아무리 서로 단절하고, 벽을 쌓고, 스스로 고립된다 해도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진정한 책임감은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편리한 실천이 아니라, 나의 모든 행위가 이 그물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아픈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도시의 저 견고한 성벽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다이버가 되어 ‘의식의 충격 요법’을 경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다이빙의 ‘본질’, 즉 단절된 감각을 회복하고 관계를 복원하는 길을 일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먼저 나의 식탁을 생태계의 단면으로 바라보자. 내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 어떤 흙과 바다에서 왔는지 그 끈을 상상해보자. 베란다나 옥상 어디든 작은 화분을 가꾸는 일은 소비자를 생산자와 다시 연결되게 해준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지적 탐험에 나서 보자. 내가 버린 쓰레기의 여정을 추적하고, 내가 마시는 물의 나이를 공부하는 일은 나의 행동이 가진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자연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어보자. 매일 지나는 가로수의 이름을 불러주고,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자연에 대한 작은 관심은 생명에 대한 존중의 시작이다.
이 모든 노력의 핵심은 세상을 ‘나를 위한 도구’로 보는 소비자의 시선을, ‘내가 그 일부인 거대한 흐름’으로 보는 관계자의 시선으로 바꾸는 데 있다. 도시의 삶이 강요하는 무관심의 벽에 아주 작은 균열을 내는 것. 그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한 줌의 햇빛과 한 방울의 물이, 결국 견고한 콘크리트 벽을 무너뜨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