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동굴에서 모든 빛을 잃는다는 건, 나를 둘러싼 작은 우주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발견한 내면의 빛이 영혼의 좌표를 가리키는 북극성이라면,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수중 라이트의 불빛은 나의 현재와 살아있는 지상의 세계를 잇는 가느다란 실이자, 생명을 붙들어 매는 단 하나의 밧줄이다.
그렇기에 케이브 다이버는 이 연약한 생명줄이 끊어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저마다 서너 개의 비상 예비 라이트를 준비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 모든 빛마저 사라진 완전한 암흑 속에서 오직 가이드라인에 의지해 출구를 찾아야 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난도의 훈련을 반복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건 그저 수사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깊은 수중 동굴에 들어가는 다이버의 혈관에 차가운 납처럼 흐르는 첫 번째 율법이다.
ⓒ 조하나
그 서늘한 자각과 함께, 어둠은 더 이상 텅 빈 공간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체의 품처럼 나를 감싸 안는다. 벨벳처럼 부드러웠다가, 빙하처럼 서늘하게 나의 모든 경계를 녹여버린다. 어둠은 나를 잡아당기고, 때로는 길을 잃게 만드는 살아있는 미로가 된다. 수천 년 동안 빛에 익숙해지도록 진화해 온 나의 눈은 제 역할을 포기하고 무거운 커튼처럼 닫혔다. 그 순간, 나는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어떤 원초적인 기억, 신화 속에서 ‘그림자’라 불리는 것과 맨몸으로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 암흑에 완벽히 적응한 생명도 있었다. 내 라이트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유령처럼 하얀 물고기 한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멕시코 동굴 어종인 ‘아스티아낙스 멕시카누스(Astyanax mexicanus)’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진화의 흔적조차 없이 매끈한 피부로 덮여 있었고, 색소포 또한 모두 사라져 반투명한 몸 아래로 뼈와 혈관이 비쳤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이 ‘퇴화 진화’라 부르는, 눈부시게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다. 빛 한 줌 없는 암흑 속에서 ‘본다’는 행위는 에너지만 소모하는 사치일 뿐이다. 생존에 불필요한 시각 기관과 뇌의 시각 영역을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그 에너지를 물의 미세한 압력 변화를 감지하는 옆줄 기관과 먹이를 찾는 화학적 감각을 극도로 발달시키는 데 사용한 것이다.
그 물고기는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세계의 주인처럼 태연했다. 그 고요한 움직임은 등골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매일 같이 살아가는 세상의 조건이, 우리의 어떤 감각을 잠재우고 또 어떤 감각을 퇴화시키고 있을까. 도시의 인공 빛과 소음 속에서, 우리 역시 정작 봐야 할 영혼의 풍경을 보지 못하는 ‘눈먼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원초적인 두려움의 한가운데서, 나는 가장 경이로운 선물을 받았다. 좁고 어두운 통로를 겨우 빠져나와 거대한 방처럼 넓은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저 멀리 다른 쪽 입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기둥을 마주한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이 침묵의 연주를 하듯 장엄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짙고 무거운 어둠이 배경이 되어주기에 더 눈부시고 성스러운, 마치 창조주의 손가락이 어둠을 쓰다듬는 듯한 빛이었다. 수천 년 된 석회암을 통과하며 곱게 걸러진 그 빛줄기 속에서, 내가 내뿜은 공기 방울들은 수억만 개의 은가루가 되어 춤을 추었고, 그 찰나의 광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기도였다.
ⓒ 조하나
한 인물의 얼굴에 스며든 빛이 그의 영혼의 깊이까지 드러내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이 한 줄기 빛은 동굴이라는 공간의 영혼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기법을 ‘키아로스쿠로’라 부른다. 오래전 플라톤은 동굴 속 그림자를 진짜 세상이라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이야기했지만, 나의 깨달음은 그 오래된 비유를 뒤집어 버렸다. 나는 빛으로 가득한 지상의 세계를 떠나 어둠의 심연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한 줄기 빛의 진짜 가치와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어둠의 서늘함을 겪어보지 않고는 빛의 따스함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나는 그곳에서 온몸으로 배웠다.
어둠 속을 유영하다 보면, 빛과 어둠이 서로 싸우는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빛은 손짓하며 나를 유혹하는 무용수 같았고, 어둠은 그 무용수가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거대한 무대였다. 빛의 커튼은 내가 다가가면 수줍게 흩어졌다가, 멀어지면 나를 위해 다시 나타나며 고요한 춤을 이어갔다. 빛과 어둠은 서로를 밀어내는 대신, 서로의 존재를 증명하고 깊이를 더해주며 하나의 완전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조하나
결국 이 깊은 동굴 속에서 내가 배운 용기란, 무작정 어둠을 이겨내는 힘이 아니었다. 빛과 어둠이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는 세상의 본질을 받아들이는 마음이었다. 빛은 그저 밝음이 아니라 ‘어둠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둠이라는 깊이를 배경으로 할 때만 제 의미를 갖는다는 변증법적 진실을 깨닫는 것. 철학자 니체가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본다’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이 순간의 실존적 무게를 이야기했던 것일까.
나를 집어삼킬 듯한 어둠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게 하는 실존적 체험이었다. 무엇 하나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함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기꺼이 나를 던져 넣음으로써 더 깊은 차원의 평화를 얻는 지혜였다. 어쩌면 삶이란, ‘어둠의 불안과 공포를 아는 자만이 빛의 위안과 희망을 이해한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깨달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
발밑의 동굴에서 겪은 이 눈부신 변주곡은, 땅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처럼 세상을 둘로 나누는 잣대 너머에, 삶의 더 깊고 풍요로운 진실이 숨 쉬고 있지 않겠느냐고. 그 심연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마음속 가장 깊고 조용한 동굴로, 기꺼이 들어갈 용기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