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권리가 없는 자들의 슬픈 코미디|넷플릭스 시리즈 <모 이야기>
글로벌 시대인 요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24시간, 365일 언제든 지구 반대편의 사람이 무얼 먹고, 어디서 자고,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지만, 정작 우리 곁의 낯선 얼굴들에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모 이야기>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이야기를 뉴스 헤드라인에서 꺼내어 미국 휴스턴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땀 흘리고, OG 힙합을 듣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울고 웃는 한 인간의 생생한 삶으로 되살려 냅니다.
<모 이야기>의 주인공 모하메드 나자르(‘모’, Mo)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살면서 무려 22년째 망명 심사를 기다리는 망명 신청자, 즉 ‘무국적자’입니다. 그는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를 떠나온 팔레스타인 난민으로 가족과 함께 망명 심사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정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는 미국과 팔레스타인, 두 개의 문화,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세 개의 언어, 그리고 수많은 개소리 사이를 오가며 살아갑니다. 합법적인 신분이 없으니 정식 취업이 불가능한 ‘모’는 최상급 위조 명품을 차 트렁크에 넣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언더그라운드 경제에 의존해 생계를 꾸려갑니다. ‘모’에게는 멕시코계 이민자인 여자친구 마리아가 있고, 독실한 신앙심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형 사미르가 있죠.
이야기는 ‘모’가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총격에 휘말려 총상을 입는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의료 보험이 없는 그는 병원 대신 타투샵을 찾아 상처를 꿰매고, 이 과정에서 얻은 진통제 코데인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미국 이민 시스템의 ‘카프카적인 관료주의’와 씨름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모’는 20년 넘게 망명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심사가 왜 그토록 지연되는지, 언제 끝날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노력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이민 시스템은 그의 가족이 겪는 고통이나 절박함을 고려하지 않고, ‘모’라는 사람을 그저 서류 뭉치 속 하나의 ‘사례’로만 취급하죠.
시즌 1의 말미엔 우연한 사고로 멕시코 국경을 넘어가게 되면서 그의 망명 신청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시즌 2는 멕시코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으로 시작해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얻고 여권을 만들어 고향땅 팔레스타인을 방문하는 여정으로 마무리되죠.
‘모’는 미국인일까요, 팔레스타인인일까요, 아니면 쿠웨이트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그의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서사를 넘어, 뿌리, 정체성, 가족, 그리고 억압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에 대한 깊은 철학과 사유를 품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모 이야기>는 주연 배우이자 공동 제작자인 코미디언 모 아메르의 실제 삶에 깊이 뿌리내린 자전적 작품입니다. 휴스턴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의 후손으로 살아온 그의 경험은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며,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추상적인 난민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희로애락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러한 진정성을 스크린에 성공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공동 제작자 라미 유세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건 시리즈 <라미>를 통해 이집트계 미국인 무슬림의 정체성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골든 글로브를 수상한 그와의 협업은 창작자 중심의 독립 영화사로 명성이 높은 A24를 통해 완성되었죠. A24의 제작 참여는 모 아메르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와 라미 유세프의 검증된 연출력, 그리고 회사의 예술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브랜드 가치가 결합된 새로운 소수자 스토리텔링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구조 덕분에 <모 이야기>는 주류 제작 시스템의 위험 회피적 관행을 우회하여 자칫 희석될 수 있었던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를 타협 없이 담아낼 수 있었죠.
제작진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결정 중 하나는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적 배경을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이전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모 아메르는 한 인터뷰에서, “만약 그 이후의 세계를 그렸다면 가족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서사적 결말이 불가능해졌을 것이며, 시리즈 전체가 ‘드라마’로 변질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단순한 배경 설정을 넘어, 팔레스타인 서사가 끊임없이 파괴적인 비극에 의해서만 재정의되기를 강요하는 외부의 시선에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바로 희망, 정체성, 그리고 귀환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권리를 보존하고 주장하는, 의식적이고도 독립된 예술적, 정치적 선언입니다.
<모 이야기>는 미국 주류 텔레비전 역사상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최초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를 인정받았습니다. 평단은 유머와 감동의 균형, 이민자 경험에 대한 통찰력 있는 묘사, 그리고 휴스턴의 인종적 다양성을 생생하게 담아낸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찬사는 주요 수상으로 이어졌습니다. <모 이야기>는 2022년 ‘텔레비전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과 고담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주연 모 아메르는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연기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물론 모든 평가가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쇼가 “정치적으로 무감각”하며 “백인 외부자 시청자에게 맞춰져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러한 비판조차도 이 작품이 지닌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특정 집단이 오랫동안 미디어에서 배제되었을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류 작품은 ‘그 집단의 모든 것을 대변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기대를 받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인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라는 찬사와 “그들의 정체성을 너무 단편적으로 묘사했다”라는 비판은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소수의 비판적 시각은 이러한 ‘최초성의 역설’ 속에서 작품이 마주해야 했던 거대한 압박과 검열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웃음을 통해 편견의 허위를 폭로하고, 일상의 소품을 통해 뿌리에 대한 갈망을 드러냅니다. 여러 장면을 통해 미국 사회에 만연한 타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심함을 정면으로 겨냥하죠. ‘모’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미국인들은 팔레스타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파키스탄과 혼동하기도 하며, 심지어 이스라엘과 같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희극적 과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이의 소외감을 드러내는 폭력적인 현실을 보여줍니다.
저도 오랜 해외 생활 경험이 있기에 ‘모’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낯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아무리 그곳에 동화되려 노력해도 예고 없이 겪어야 하는 불특정다수의 무례함에는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좋습니다. 저는 한국인이라고 할 때마다 ‘남한이냐, 북한이냐’라는 질문부터 ‘김정은과 친구냐’라는 조롱 섞인 농담까지, 그들이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개별적 존재를 ‘분단국가’라는 거대한 스테레오타입의 틀에 가두려는 폭력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요즘 한국의 위상이 많이 오른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며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의 이미지를 스테레오타입으로 가지고 있는 서구권 백인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제가 속한 문화의 일부를 자신들의 얄팍한 기준으로 ‘수준 이하’라 폄하하던 그들의 오만한 시선 앞에서, 저는 ‘모’처럼 웃음으로 저항하는 대신 침묵을 택한 적이 더 많았습니다. “아랍 이름은 왜 죄다 ‘모하메드’냐”라는 친구의 말에 “너희 남미 사람들 중 ‘호세’라는 이름이 대체 몇 명인 줄 아느냐”라고 되묻는 ‘모’처럼 재치 있게 받아치질 못했어요. 이런 대화는 다수자가 소수자의 개별성을 얼마나 쉽게 지워버리고 스테레오타입으로 환원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름은 개인의 고유성을 상징하지만, 이민 사회에서 특정 이름은 그저 ‘타자’를 식별하는 낙인이 되기도 하죠.
주멕시코 미국 대사관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분쟁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미국 대사에게 ‘모’는 목소리를 높여 외칩니다. “‘갈등(conflict)’이 아니라 ‘점령(occupation)’”이라고 말이죠. ‘갈등/분쟁’이라는 단어는 양측에 동등한 책임을 부여하는 중립적인 용어처럼 보이지만, 힘의 불균형을 은폐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희석합니다. 이러한 프레임은 ‘모’의 개인적인 의견을 넘어 국제법적 근거를 가지는데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여러 차례의 권고적 의견을 통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장기적인 주둔과 통치는 ‘불법적인 점령’에 해당하며, 이는 무력에 의한 영토 획득 금지 원칙과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결권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점령 지속이 불법이며, 가능한 한 빨리 종료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죠. 그러나 든든한 미국을 뒷배로 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을 내쫓고 얻은 땅을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 ‘모’가 미국의 시민이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죠. ‘모’의 외침은 자신과 가족, 민족의 고통을 정확한 언어로 명명하려는 시도이자 역사의 진실을 되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입니다.
‘모’는 어디를 가든 어머니가 직접 짠 올리브 오일 병을 마치 부적처럼 지니고 다닙니다. ‘모’에게 올리브오일은 자신의 뿌리와 유산을 상징합니다. 제가 해외에서 지낼 때 항상 핫소스를 가지고 다니던 멕시칸 친구가 생각나더군요. 저도 향수병을 앓을 땐 튜브형 고추장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팔레스타인인에게 올리브 나무는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땅과의 연결, 평화,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저항 정신, ‘수무드’ 그 자체입니다. 올리브는 그들의 삶이자 영혼이죠. <모 이야기>는 이 상징을 정치적 맥락에서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농부의 올리브 나무를 베어내는 행위는 재산 파괴가 아니라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뿌리 뽑으려는 시도인 것이죠. 따라서 ‘모’가 올리브오일에 집착하는 것은, 22년간 망명자로 살아오며 물리적으로는 뿌리내리지 못했지만, 자신의 영혼만큼은 팔레스타인 땅에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후무스’를 둘러싼 그의 분노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후무스 전쟁’이라 불리는 이 논쟁은 음식의 기원과 소유권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정치적, 문화적 갈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후무스를 자국의 ‘국민 음식’처럼 상품화하는 것에 대한 모의 분노는 단순한 음식 원조 논쟁이 아닙니다. 땅의 점령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유산마저 도용당하고 그 기원이 지워지는 ‘문화적 학살’에 대한 저항입니다. ‘모’가 후무스를 두고 벌이는 논쟁은 곧 서사적 주도권을 되찾고, 자신들의 문화적 산물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정체성이 지워지는 것에 저항하는 대리전인 셈입니다. 22년간 미국에 살면서도 그가 이토록 팔레스타인의 상징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그가 ‘돌아갈 권리가 없는 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끈이기 때문입니다.
‘모’가 올리브유 병을 곁에 두는 모습에서, 저는 이역만리 타향에서 저를 지탱해 주었던 ‘김치’의 시큼한 냄새를 떠올렸습니다. 이방인에게 김치는 그저 냄새나는 발효 음식일지 모르나, 저에게 김치는 ‘집’이자, ‘엄마’이자, 나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깃발과도 같았죠. 또한 고된 하루 끝에 동료들과 함께 불판에 둘러앉아 굽던 ‘삼겹살’ 한 점은, 한 끼 식사를 넘어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연대하는 한국인만의 신성한 의식이었습니다. 해외에 살 땐 그런 것들이 많이 그리워지더군요. 바로 ‘모’가 올리브오일과 후무스의 정통성과 이야기를 지키려 싸우는 것은 바로 이 빼앗길 수 없는 기억과 연대의 맛을 지키려는 저항이자 투쟁입니다.
22년째 망명 신청자로 살아온 ‘모’는 국경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경계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습니다. ‘모’는 법적으로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닙니다. ‘모’의 가족은 1990년 걸프전 당시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이라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쿠웨이트에서 추방당했고, 팔레스타인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며, 미국에서는 여전히 이방인입니다. 그의 ‘무국적’ 상태는 법적 지위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잠식하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그는 영어, 아랍어, 스페인어, 세 개의 언어를 구사하지만, 어느 언어로도 자신의 온전한 존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의 가족은 원래 살던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는 현상 또는 그러한 집단, 즉 ‘디아스포라’가 겪는 고통의 축소판입니다. ‘모’의 어머니 유스라는 잃어버린 고향, 가자 지구에 여전히 살고 있는 가족과 친척들을 걱정하며 뉴스에 과몰입되어 있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형 사미르는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머니가 사미르를 전문 기관에 보내는 대신 자신의 사랑으로 감싸려는 모습은, 낯설고 비정한 세상으로부터 가족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지키려는 모성의 표현이자, 동시에 외부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죠.
시즌 2에서 ‘모’의 가족은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얻고 여권을 만들어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지만, 그들의 고향 땅은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밟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땅으로 ‘돌아갈 권리’마저 타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아프게 보여주죠. 저는 이 장면에서 평생을 실향민으로 살다 가신 할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에게 고향은 지척에 두고도 살 수 없는 땅, 돌아갈 수 없는 과거였습니다. 가자 지구에서 자신의 땅을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처럼, 할아버지는 끝내 북녘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가는 풍습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사는 팔레스타인의 문화는 서구 사회엔 낯설지만, 우리에겐 친숙합니다. 시리즈는 이를 통해 ‘모’의 가족이 휴스턴 한복판에 어떻게 자신들만의 작은 ‘고향’을 가꾸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문화적 습관들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낯선 환경 속에서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고 정체성을 지키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합니다.
작품에서 ‘모’는 자신의 정체성을 여러 문화가 뒤섞여 하나가 되는 ‘멜팅 팟(melting pot)’이 아닌, 각자의 고유성을 유지하며 조화를 이루는 ‘샐러드 볼(salad bowl)’에 비유합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관계는 멕시코계 가톨릭 신자인 여자친구 마리아와 나이지리아계 미국인 절친 닉을 통해 형성되죠. 극의 대사는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이들 공동체 간의 문화적, 종교적 긴장과 유대를 섬세하게 탐색합니다.
이 시리즈는 연대가 종종 공동의 억압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모’가 멕시코에 발이 묶였을 때, 그의 이야기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으려는 라틴 아메리카 이주민들의 고난과 연결됩니다. 그가 이민자 구금 시설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 시퀀스입니다. 시리즈는 이 시설들을 출신 국가와 상관없이 모든 이주민에게 가해지는 시스템적인 비인간화, 인종차별, 그리고 잔혹함이 자행되는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서사적 장치는 미국-멕시코 국경 문제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팔레스타인 난민의 경험을 동일한 렌즈를 통해 보도록 강제합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미국 국경을 넘는 남미 이민자들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서로 다른 지정학적 투쟁을 ‘안식처를 찾는 하나의 인간적인 이야기’로 통합시킵니다.
이러한 약자들의 연대는 비단 낯선 땅의 이방인들 사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 속에 깊이 각인된 ‘저항의 DNA’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억압받는 자의 설움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죠. 나라를 잃은 설움 속에서 서로를 보듬고, 독립을 위해 힘을 합쳤던 그 기억이 바로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아픔에, 그리고 세상의 약자, 소수자들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유일 겁니다. ‘모’가 멕시코 국경을 넘다 잡힌 이주민들의 처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 역시 ‘모’의 모습에서 식민지 시대를 견뎌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그 연대감은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죠.
팔레스타인의 오래도록 가슴 아픈, 현재 진행 중인 통한의 역사를 ‘코미디'로’ 표현했다는 것은 이 작품의 지독한 아이러니이자, 가장 위대한 성취입니다. 우리는 흔히 코미디를 비극의 반대편에 있는 가벼운 것으로 여기지만, 인류의 위대한 예술은 언제나 비극과 희극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있음을 보여주었죠. 셰익스피어는 가장 처절한 비극 속에 어릿광대를 등장시켜 진실을 말하게 했고, 채플린은 히틀러라는 광기의 시대를 풍자하며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연설을 남겼습니다.
이 작품이 던지는 가장 심오한 철학적 질문은 ‘압도적인 고통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시리즈는 그 답을 바로 이 ‘웃음’에서 찾습니다. 시즌 2에서 어머니 유스라는 “세상이 우리를 무너뜨리려 할 거야… 그럴 때 우리는 웃는다”라는, 시리즈의 핵심을 관통하는 생존 철학을 아들에게 건넵니다. 이 웃음은 수동적인 수용이나 용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정교한 저항에 가깝죠. 이 웃음은 내면의 자유와 존엄성을 선언하는 행위이며, 억압자에게 자신의 영혼이 꺾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만족감을 주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가능한 웃음이며, 고통 속에서 웃을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을 때 가능한 궁극적인 인간성의 증명입니다. 이 철학은 ‘모’의 누나 나디아의 대사에도 드러납니다. “엄마, 우리는 고통과 고난, 그 이상이에요. 이렇게 해야 저들이 우리를 지울 수 없어요.” 살아남고, 기쁨을 찾고,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 자체가 팔레스타인인들의 궁극적인 형태의 저항인 것입니다.
시리즈의 대미는 팔레스타인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 ‘모’가 이스라엘 세관 직원에게 표적 심문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의 횡포와 조롱 앞에서 ‘모’가 짓는 지친 미소는 이 작품의 철학의 완성이자, 보는 이의 눈물을 터뜨리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이죠. 그는 분노하는 대신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모욕하려는 상대의 의도를 무력화시킵니다.
이 주제는 ‘모’를 연기한 코미디언 모 아메르 자신의 철학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코미디를 “고통스러운 것을 이야기하는 경이로운 도구”라고 칭하며, 고통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생존 방식이라고 말하죠. 그는 너무 울다 보면, 결국 이유도 모른 채 웃게 되는 순환을 압도적인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 반응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모의 그 마지막 미소에서 한국인의 정서 깊은 곳에 자리한 ‘한(恨)’을 봅니다. ‘한’은 단순히 슬픔이나 분노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인 억울함과 상실감, 체념과 저항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을 말하죠. 나라를 잃고, 고향을 빼앗기고, 가족과 흩어져야 했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통한의 역사는 우리의 한 맺힌 근현대사와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모’의 웃음은 모든 것을 초월한 해탈의 미소가 아니라, 너무 깊은 슬픔과 억울함을 속으로 삭이고 버텨낼 때 비로소 나오는, ‘한’이 담긴 역설적인 미소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괜찮다’는 뜻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라는 처절한 자기 증명에 가깝습니다.
‘모’의 마지막 미소는 심문이라는 권력관계를 전복시킵니다. 이스라엘 세관 직원의 목표는 ‘모’를 용의자, 위협적인 존재, 열등한 타자로 규정하고, 그가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웃음으로써 ‘모’는 이러한 주체적 위치를 거부합니다. 그 미소는 “당신은 나의 존엄을 해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맞서는 가장 조용하고도 위대한 승리 선언이자 궁극적인 자유의 표현입니다.
‘모’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와 볼까요.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이고 폭력적이고 반인권적인 반이민 정책과 국경 장벽 건설, 유럽의 극우 정당 집권과 난민 혐오 정서 등은 ‘모’가 겪는 고난이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모 이야기>는 정치적 담론이나 미디어에서 종종 악마화되거나, 단순한 통계의 숫자로 환원되는 집단들, 즉 팔레스타인인, 망명 신청자, 미등록 이주민들을 인간화하며 강력한 공감의 매개체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민국은 단일민족 신화에 기반한 폐쇄성과 배타성이 여전히 강한 나라죠. 이는 1.53%라는 세계 최저 수준의 난민 인정률로 이어집니다. 또한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인권 침해에 시달리고, 다문화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외국인 대상 혐오 범죄가 급증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타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되돌아보게 합니다.
‘모’의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이고, 강인하면서도 연약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추상적인 ‘난민 문제’가 아닌, 집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코미디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장벽을 허물고 공감의 다리를 놓을 수 있는지를 탁월하게 증명하죠.
저는 한동안 해외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났어요. 군부 쿠데타로 몇 년 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실종된 가족에 애만 끓이고 있는 미얀마 친구 '씬'을 만났고,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 이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가야했던 '블러썸'도 만났죠.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크라이나인 '라나'와 러시안 '세르게이'는 우리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조촐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들은 제가 네모난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를 만난 사람들일뿐, 저도 언제든 그들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우린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에서 여전히 휴전 중인 상태로 살고 있으니까요.
점점 더 분열되는 세상 속에서, <모 이야기>는 우리에게 곁에 있는 ‘이방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의 이름을 불러줄 용기를 건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지치지 말고, 성실하고 집요하게, 이방인에게 이름과 얼굴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이죠. 얼굴과 이름이 삭제된 ‘팔레스타인 난민’은 불특정 다수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알면 '텍사스 휴스턴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모', '영국 런던에 사는 시리아인 샤리프'가 됩니다. 그렇게 아는 사람, 내 이웃, 내 친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고통이 나에게 전해지고, 결국 그것이 공감과 연대의 시작이 됩니다.